심은경 & 김유정 - 누구의 딸도 아닌 '여배우들'
※ 이 글은 익무여신님에 대한 '도발'이 아닌 '애정표현'입니다. ...진짜에요...
얼마전 M.net에서 방송하는 '위키드'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어린이들이 나오는 오디션 프로그램인데 확실히 내 취향인 프로그램은 아니라서 적당히 보다가 넘겼다. 원래 어린이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오디션 프로그램도 별로 안 좋아한다. 두 장르가 절묘하게 만났다. 도저히 볼 이유가 없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K팝스타'같은 오디션 프로그램도 별로 안 좋아한다. 한참 꿈을 꾸고 사랑을 배워야 할 나이에 '경쟁'을 먼저 배우고 좌절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게 괴로웠다. '꿈'을 위한다는 명분은 있지만 '꿈'을 위해 그토록 가혹한 상황에 던져놔야 한다는 것은 여느 '학대당한 아이들' 못지 않게 잔인한 장면이다. 게다가 TV프로그램이라는게 대기업의 공산품과 같아서 겉으로는 "아이들의 꿈을 위한다"고 하지만 광고가 오고 가고 자본이 움직이는 '머니게임'이다. 학교에서 공부로 경쟁하는 아이들은 기어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돈에 휘둘린다. 기어이 어른들이 '극혐'이 되는 순간이다.
여기에 또 하나 괴로운 이유는 여러가지 경험하고 꿈을 키워야 할 아이들이 너무 일찍 꿈을 정해버리는 것이 슬펐다.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졌던 탓에 다른 것을 보려 하지 않았고 경험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청춘의 특권, 혹은 그 이상의 다양한 경험을 누리기 위해 조금 꿈을 늦게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금부터 언급하는 두 배우, 심은경과 김유정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배우'가 된 아이들이다. 한국영화와 드라마를 대표하는 아역배우의 시절을 거쳤고 지금은 새 시대를 이끌 대세배우로 성장하고 있다. 영화팬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배우들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의 추억보다 일에 집중했을 것을 생각하니 씁쓸해진다. 물론 두 사람 뿐 아니라 많은 아역배우들(아이돌 가수)이 꿈을 위해 젊음의 특권을 내려놨을 것이다. 이 글이 그 소년과 소녀들에게 전하는 응원이자 위로였으면 좋겠다.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부터 쌓아온 커리어이며 지금도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그들의 경력에 존경을 표하며 이 글을 시작한다.
1994년생인 심은경은 11살때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주인공 명세빈의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많은 드라마에서 대부분 '주인공의 아역'으로 커리어를 쌓는다. 많은 아역배우들과 다를 바 없이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듬해 그녀는 영화팬들이라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영화 '도마 안중근'에서 안중근의 딸로 출연하며 영화에 데뷔한다. '도마 안중근' 이후 2007년까지 드라마로 커리어를 쌓던 심은경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한 차례 화제를 모은다. 이때도 그녀는 여자주인공 이지아의 아역이었다.
심은경의 두 번째 영화는 2007년 '헨젤과 그레텔'이다. '누구의 어린 시절'이 아닌 온전한 자기 역할로 등장한 게 꽤 오랜만인 작품이다. 이 기괴한 변주곡에서 심은경은 극의 분위기에 잘 맞게 기묘한 분위기를 살린다. 이후 심은경은 드라마와 영화를 오고 가며 열심히 커리어를 쌓는다. 영화팬이라면 심은경의 작품 중 특히 기억하고 싶은 작품이 '불신지옥'일 것이다. 찍는 본인은 대단히 괴롭게 찍었으리라 생각되지만 보는 관객들은 "이게 몇 년만에 보는 국산 호러의 수작이냐"며 열광했다(물론 흥행은 잘 안됐다).
그리고 2011년, 심은경 커리어의 정점이 된 영화 '써니'가 공개된다. 여기서도 그녀는 이전처럼 '누구의 어린시절'이었지만 그 어린 시절이 영화의 중심인 작품에서 그녀는 충분히 빛을 발했다. 마치 "어린 시절도 해 본 사람이 안다"는 것을 보여주듯 능숙하게 철없는 여고생의 모습을 선보인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녀는 '광해, 왕이 된 남자', '수상한 그녀' 등에 출연하며 또래의 20대 여배우들이 갖지 못한 대기록을 갖는다. 최근 한국영화를 돌이켜보면 '여배우 원톱주연작'을 찾기가 어렵다. 심은경의 작품 '수상한 그녀'는 여배우 원톱주연작 중 최고 흥행을 기록한 작품이다. 아마 과거에도 이 정도 기록은 없었을 것이다.
고교시절 심은경은 연기활동을 쉬고 유학생활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관객 입장에서 그 공백이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지만 심은경은 스스로 쉬는 시간을 보내고 왔다. 그 때문인지 2015년부터 심은경은 거침없이 바쁜 행보를 보내고 있다. 마치 "제가 지금부터 거침없이 달릴테니 손잡이 꽉 잡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로봇, 소리'를 시작으로 '널 기다리며', '서울역', '조작된 도시'(가제), '궁합', '걷기왕', '특별시민' 등. 심은경은 바쁘다. 그래서 팬들은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초창기부터 '가장 핫한 아역배우'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김유정은 공교롭게도 심은경과 같은 해에 데뷔한다. 그러니깐 그때 그녀의 나이 6살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김유정은 초창기부터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데뷔작은 역시 영화팬이라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영화 'DMZ비무장지대'다. 하지만 바로 다음 작품은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다. 이후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어느날 갑자기', '각설탕' 등 영화 위주로 경력을 쌓다가 2006년이 돼서야 드라마 '인생이여 고마워요'로 입문한다.
초창기부터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누구의 어린 시절'을 도맡던 김유정은 2008년 영화 '추격자'에서 미진의 딸로 주목을 받는다. 서슬퍼런 이 스릴러영화에서 김유정은 훈훈한 쉼표이자 관객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끌어내는 정점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괴상한 천만영화 '해운대'에서도 영화의 한줄기 희망처럼 영화를 빛내준다. 김유정도 어쩔 수 없이 '누구의 어린 시절' 혹은 '누구의 딸'이었지만 굉장히 다작을 한 편이다.
이 다작을 거쳐 2010년에는 개인적으로 김유정을 기억나게 하는 작품 '구미호:여우누이뎐'을 만나게 된다. 온전히 자기 이름으로 한 연기이며 끝까지 극을 이끄는 주연이었다. 나는 이 드라마에서 연이(김유정)를 대단히 좋아한다. 강하지만 여리고 슬픈 소녀 구미호의 모습이 잘 그려졌다. 온전히 김유정의 덕이었다. 이 작품 이후 2년 뒤, 김유정의 운명의 작품인 '해를 품은 달'을 만난다. 영화로 먼저 시작한 김유정이지만 그녀를 스타로 이끈 작품은 드라마다. 어쩐지 심은경과는 반대되는 행보다.
다소 이른 나이에 '아역'의 티를 벗는게 아닌가 싶겠지만 김유정은 일찌감치 아역을 벗어난다. '동창생'과 '우아한 거짓말' 등에서 그럴듯하게 중심을 잡고 자기 역할을 해내는 김유정은 여전히 소녀지만 또래의 배우들이 감당하지 못할 굵직한 역할을 소화해낸다. 영화와 드라마, 예능을 오고가며 거침없이 커리어를 쌓아가는 이 여배우는 대단히 이른 나이에 '아역'을 넘어 '대세'가 돼버렸다.
10년이 넘는 커리어를 착실히 쌓은 두 여배우의 '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이 있을까? 물론 성인이 돼서 시작한 연기와 아역부터 시작한 연기는 다르다. 교사들에게 주로 듣던 이야기가 "아이들은 학습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같은 외국어를 배워도 어른이 돼서 배우는 것보다 아이때 배우는 것이 잘 습득된다는 것이다. 연기도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심은경과 김유정, 그리고 "잘한다"는 소리를 들은 많은 아역배우들은 교과서적이고 잘 학습된 연기를 보여준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국의 여러 작품들에서 아역들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그런 부분일테니 말이다.
심은경과 김유정은 이미 10년 넘게 그런 학습을 활용하고, 활용하며 학습해왔다. 알파고가 대국을 반복하면서 진화하듯, 아역배우의 연기는 그렇게 진화해왔다. 이 진화가 여실히 보여지는 것은 두 배우의 '집중력'에 있다. 역할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기본적인 일이다. 어쩌면 이것은 심은경과 김유정의 최대 장점일 수 있다. 아역배우들은 주로 경력이 꽉 찬 성인연기자들과 호흡을 맞출 때가 많다. 주로 '누구의 딸'일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이들을 상대하는 부모들은 경력이 꽤 쌓인 성인연기자다. 그들을 상대하면서 집중력을 '경험'한 배우들은 커서도 그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역배우 출신들이 연기를 잘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앞서 내가 말한 것과 대단히 상반된다. "너무 일찍 꿈을 향해가는 것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해놓고서 "연기는 어릴때 시작하는 것이 잘하는 길이다"라고 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 두 배우의 학창시절을 100% 알지는 못하지만 또래들과 다른 생활을 보냈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 시절이 두 사람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지는 모르겠다. 꿈을 위해 희생한 시간이라고 감내하고 이겨냈을 수도 있고 마음 한 켠의 진한 아쉬움, 후회로 남았을 수도 있다. 만에 하나라도 후자로 그 기억이 남아있다면 "버린 만큼 얻어갈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기 삶에 확실한 무기를 갖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다. 겪어보니 알겠다.
씁쓸한 이야기는 20대가 되면 또래의 친구들이 갖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성공한 아역배우에게도 예외가 없는 일이다. 한 아역배우는 어린 시절 큰 주목을 모으다 지금은 연기활동을 접고 무용 프로듀서로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그녀의 행보는 배우와 상관없는 30대 아저씨인 나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바로 지금, 혹은 몇 년 뒤 미래에 대한 고민이 찾아올 때 부디 그녀들이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해주길 바란다. 설령 그녀들이 앞서 말한 모 아역배우처럼 연기활동을 접고 다른 길을 가더라도, 박수와 응원으로 그녀들을 보내주고 싶다. '꿈'과 '행복'은 별개의 문제다. 나와 상관없는 소녀들이지만 이들이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팬심'이 그런 것이라면 이것을 '팬심'이라고 해두자.
심은경은 1994년생, 올해 23살이다(만으로는 21살이다). 김유정은 1999년생, 18살이다(만 나이는 굳이 적지 않겠다). 배우로서 10년 이상의 커리어를 가지고 있지만 진짜 자신만의 연기가 완성되는 시기는 바로 지금부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은 그녀들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우로 남건, 아니면 그만두건, 어디선가 온전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 심은경과 김유정, 또래의 아역배우들, 그리고 많은 청소년들이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른들이 아무리 후진 세상을 만들어놔도 부디 그들이 살 세상은 정이 넘치고 갈등하나 화해할 줄 아는 행복한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갈등없는 세상은 좀 비인간적이다). 그들은 누구의 딸(아들)도 아닌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추신) 심은경과 김유정은 2009년 '불신지옥'에서 함께 만났다. 당시 심은경은 주인공 소진이었고 김유정은 형사 태환(류승룡)의 딸로 '우정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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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 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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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영화 데뷔작인 건 몰랐네요. 헨젤과 그레텔인 줄 알았는데...


와, 진짜 두 배우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네요.
멋진 글 잘 봤습니다!
우아 정성과 애정어린 글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수위님 이시간까지 왜 안주무시는건가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