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
ever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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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건 - 홍대앞에 눈이 내리면 날 조롱하는 망상을 힘겹게 밀어내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옅은 기억속 회색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뻗어나오는 흉흉한 빛에 심장은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벨소리가 울릴때마다 동굴 구석에서 터오르는 먼동이 눈을 부시듯 과거를 감춘 검은 유리벽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잊고 싶었던 지겨운 칙칙함이 흘러나와 심장속으로 침윤하기 시작했다. [부재중 통화 1개 입니다. -발신번호 표시제한-] ... 주말 낮잠을 즐기고 맞은 새벽이라 그런지 정신은 더없이 맑았다. 느닷없이 목소리'들'이 듣고 싶었다. 나와는 너무 다르지만 다르기에 아름다운 이들의 세상살이를 엿듣고 싶었다. ... 아르바이트를 구한다고 잡코리아와 구인신문을 뒤적이는 평생지기와, 뜬금없는 연락에도 내 잡스런 고민을 늘 가만히 들어주는 학교 후배와, 전직장에서 날 소담히 아껴준 과부 상사와,(등뒤에서 내어깨를 안마해주는걸 좋아했다) 몇달전 내게 고백했다 쓴소리 들으며 차이고도 여전히 어장관리에 여념이 없는 모 드라마모임의 새침녀와, 며칠전 [너설마 뒈졌냐?]라는 귀엽고 깜찍한 안부문자를 보내온 동네노는형과, 이전 고시원에서 함께 죽어라 막걸리 마시고 옥상 위에서 오줌누던 노가다 아저씨와, 더워죽겠는데 비가 안온다고 괜시리 나에게 화풀이 하는 초등학교시절 짝궁과, 안부를 이야기 했다. 유난히 대화가 많았던 하루였다. 조금 일찍 집에 돌아와 저녁을 깨작깨작 해치우고 나니 마음이 허해서 달래야겠다 싶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고민을 갖고 울고 웃으며 부대끼고 있었다. 다소 무거워진 마음을 털어내고 그들이 읊조리는 자신들의 삶의 가치에 귀기울였다. 활짝 웃으며 행복하노라 고백하는이도 있었고 눈물을 울먹이며 시간이 세월이 그저 빨리만 지나갔으면 하매 힘겨워 하는 이도 있었다. 나보다 더 웃고 나보다 더 울었다. 마네킹처럼 마냥 세월이라는 시계추에 몸을 맡긴 나보다는 '살아가고 있다'라는 느낌.. 덕분에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오랜만에 웃었다. ... 홀로 방안에서 혼자 한껏 웃고 난뒤엔 필연적으로 싱거워지는 시간이 도래한다. 수상한 시간에 수상한 공간안에서의 수상한 기분, 약간의 머뭇거림 끝에 난 휴대폰을 다시 꺼내 들고 손끝에 익숙한 번호를 꾸욱꾸욱 눌렀다. [전원이 꺼져 있으니..] 입술을 이죽거리곤 편의점에 가서 크래미와 기네스맥주 하나를 사와 TV앞에 가부좌를 틀었다. 바보상자 안에는 마치 웃는것밖에 모르는 바보들마냥 배우, 가수 가릴 것 없이 얼굴을 내비치며 한껏 희희낙낙이다. 이내 그네들의 웃음이 불편해져 입에는 크래미 한조각 물고 남은 맥주를 손에 쥐고는 거리로 향했다. 주말을 기다렸다는 듯 흥분한 차들의 경적소리는 거리를 가득 메우고 그만큼이나 어지러이 흩뿌려진 네온사인은 밤을 메웠다. 한참 질질 다리를 끌며 다니니 슬리퍼가 엄지발가락에 자꾸 걸려 살갗이 벗겨졌다. 따끔따끔- 미간을 찌뿌리며 손가락에 침을 한껏 발라 문대었다. 허리를 구부린채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가만히 주저 앉아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여기 홍대앞에서~♬ 거리의 불빛보다 더 많은 눈이~♪] 핸드폰 액정에 뜬 [발신번호 표시제한]. 그 어떤번호보다 낯익고 반가'웠'던 번호. 곰곰히 있다 휴대폰을 쥐어 들었다. 통화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수화기에 입을 갖다대고는.. 지금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노라고, 너무 뜬금없이 안부라며 연락 말라고. 부디 잘지내라고 이야기 한 뒤 먹먹해진 심장을 달래고저 주먹으로 톡톡 두번 두드렸다. 싱거운 한숨을 내뱉고 휴대폰 종료버튼을 5초간 누른다음 뒷주머니에 무심히 꽂아넣었다. 그렇게 너에게 안부를 물었다. ... 과거의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나는 잘 있으니 과거의 그녀를 잘 대해 달라고, 현재의 그녀가 현재의 나에게 다가오지 않게 잘 다독거려주라고.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지 말자고. ... 때론 어긋난 진심이 관계를 역행하는 경우도 있다. 길은 두갈래로 나뉜다.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던가, 관계가 무너지던가. 혹은 둘다. ... 깨어진 유리조각이 되어 불편한 기억파편으로 지겹게 박혀있는 과거의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은 나로 비롯되지 않는 누군가와의 행복이다. 인연이란 단어는 늘 현재시제로 존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