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atience stone (2012) 의심의 여지 없는 걸작. 처음 본 아프가니스탄 영화. 스포일러 있음.
사실 영화라기보다 연극 같다.
영화가 엄청 섬세해서, 거의 단편소설적인 섬세 정교한 심리묘사와 전개를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캐릭터 묘사가 아주 섬세하고 설득력 있다. 사실상 여주인공 일인극이다. 그리고 대부분 대사가 독백이다. 가장 난이도 높은 영화구조다.
연출이나 여배우의 열연이나 모두 일급이다.
관객들은 마치 빠져들듯 여주인공의 상황에 몰입하게 된다.
포탄과 천둥같은 폭음이 바깥에서 공기를 격렬하게 흔드는데, 텅 빈 방안에 여자가 한명 있다.
그녀 앞에는 식물인간이 된 남자 하나가 누워 있다. 자기 혼자서는 눈도 못 감는다.
여자는 거의 체념상태다. 식물인간이 된 남자는 그녀 남편이다.
총과 탱크를 몰고와 주민들을 학살하는 군인들은, 마을주민들과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다.
같은 무슬림들이다. 하지만, 서로 학살하는 데는 조금의 주저도 없다.
여자는 폭탄이 집 바깥에서 터지자 공포에 떤다. 두 딸들을 데리고 방공호에 가 숨는다. 남편은 방안에
내버려둔 채....... 하지만, 폭격이 끝나 방안에 돌아오자 죄책감을 느낀다.
여기까지만 보면,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지키려는 여자의 눈물 겨운 이야기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이제 시작이다.
여자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지, 아니면 자신을 지배하던 남편과의 관계가 이제 역전된 것을
즐거워하는지 식물인간이 된 남편에게 자꾸 이야기를 건다. 남편이 들을 리 없으니, 독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녀의 독백을 통해, 이 여자가 남편과 함께 산 지 고작 이년밖에 안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섬세한 대사를 통해 서서히 주제의 본질에 다가가는 솜씨가 아주 훌륭하다.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무슬림의 영웅이었다.
여자는 남편도 없이, 남편 사진만 곁에 두고 결혼식을 올린다. 여자만 빼놓고 모두 즐거워한다.
여자가 결혼하여 시집에 가서 살자, 시어머니는 여자를 괴롭힌다. 시어머니는 여자가 처녀인지 아닌지 검사한다.
남편은 전쟁터에 가서 집에 오지 않는다. 마침내 남편이 집에 오자, 남편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나 고마움같은 것은
표현하지도 않고 그냥 강간하듯 섹스를 한다. 그리고, 방 바깥에서 시어머니는 여자가 처녀인지 아닌지
감시하고 있다. 여자는 남편에게서도 시댁 가족들에게서도 사랑이라는 것을 기대하길 포기한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정복욕을 충족시키는 노예 취급한다. 여자는 자위를 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젊은 여자는 죄의식을 가지면서도 성욕을 충족시키려 한다. 여자가 땀에 절어 헐떡거리는 모습을 본 남편은
왜 그러냐고 묻는다. 여자가 감기에 걸렸다고 둘러대자, 남편은 자기에게 감기가 옮을까 봐, 여자더러 애들한테
가서 자라고 명령한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영화의 남편은, 여자가 목숨을 걸고 애틋하게 지킬 만한 남자가 아니다.
여자가 여기까지 독백하자, 영화는 엄청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여자는 전쟁 이전에 이미 지옥 속에서 살고 있었다. 왜 여자가 그렇게 남편을 지키려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서로 함께 산 시간은 이년밖에 안된다. 남편은 여자에게 사랑을 준 적도 없고,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배당하고 정복당하고 사랑이라고는 없는 무미건조한 삶 속에 내던져진 여자는, 남편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길 포기했다. 자기 멋대로 전쟁터에 나가, 목덜미에 총알이 박혀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여자는 왜 목숨 바쳐 지키려 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여자는 두 딸들만은 안전한 곳에 피난시켜두고 싶다. 창녀촌에서 포주노릇을 하는 자기 이모에게 두 딸들을 맡겨 놓는다. 이모는 어엿한 집에 시집가서 양갓집 부인으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모가 불임임이 밝혀지자,
남편은 아내더러 부모에게 가서 하녀노릇을 하라고 쫓아낸다. 하루 아침에, 그 이모는 그 집안에서 아내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남편의 형제들이 밤에 찾아와서 그 이모를 강간해댄다. 참다 참다 못해서 그 이모는
남편의 형제를 살해하고 도망친다. 시댁식구들에게 잡히면 보복살해 당한다. 그 이모는 사회의 음지에 숨어 창녀가 되어 산다. 하지만, 사회에서 경멸받는 존재가 된 대신, 사회의 어리석은 관습으로부터 자유롭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회구조를 조롱해댄다. 여자는 그런 이모에게 공감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여자는 남편 곁에서 독백을 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메추라기싸움을 시키기 위해, 메추라기를 키우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자가 어릴 적, 아버지는 메추라기를 사다가 훈련시켜 싸움을 시키는 데 열중했다. 말하자면, 도박같은 것이다.
자나깨나 메추라기를 품에 안고 극진한 사랑을 쏟는다.
하지만, 자기 딸들에게는 애정을 주지 않는다. 메추라기싸움에서 지고 온 날은,
아버지는 딸들을 이유없이 때린다. 어리석은 아버지는 메추라기싸움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액의 돈을 걸었다가
파산한다. 아버지는 자기 큰 딸을 팔아 버린다. 둘째였던 주인공 여자는 공포에 질린다.
그녀는 메추라기를 죽여 버린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여자는, 아버지에게 해야 할 분노를 식물인간인 남편에게 퍼붓는다.
아버지나 남편이나 이 억압적인 사회에서 똑같은 비정하고 폭군같은 존재다. 여자는 "자기가 남편과 대등한 위치에서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남편은 이것을 들어야만 하는" 상황에 대해 행복을 느낀다.
여자는 자기가 남편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쯤 되자, 영화는 180도 반전된다. 전쟁의 공포로부터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지키려는 애틋한 순애보가 아니다.
그녀가 있는 좁은 방안은, 전쟁 이전부터 이미 공포스럽고 암울한 공간이었다. 여자는 어쩌면,
이 방을 박차고 나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존재였을 지 모르겠다.
이제 여자가 식물인간이 된 남편과 함께 있는, 이 좁고 아무 장식 없는 무미건조한 방안이 아주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이 사회가 여자에게 강요한, 좁고 비정하고 억압적이고 숨막히는 돼지우리다. 여자는 정신적으로 점점 더 폭주하기 시작한다. 여자의 목소리에는 이제 폭력과 분노가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아주 훌륭한 일인극 같다. 주연여배우의 연기는 아무리 극찬해도 모자라다.
관객들이 서서히 주인공의 내면과 상황에 젖어들도록 만든다.
영화는 전쟁의 공포에서, 여자가 느끼는 억압적인 사회의 공포로 옮겨간다.
영화 처음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처참하게 학살당한 시체를 보여주었는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것은 별로 처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자가 겪는 현실이 더 처참하기 때문이다.
이때 방안에 적군이 총을 들고 쳐들어온다. 여자 혼자 식물인간이 된 남편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적군은 대놓고 여자를 강간하려 한다. 여자가 자기는 창녀라고 둘러대자, 적군은 역겹다고 욕을 하며 죽일 듯하다가
그냥 나가 버린다. 이모 말에 따르면, 이때 적군은 여자가 더러워서 나가버린 것이 아니다.
창녀는 강간해 봤자 정복욕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버려버린 것이다. 여자는 자기를 창녀라고 말했던
사실이 부끄러워서 혼자 운다.
하지만, 적군들 중에 말더듬이에 어리버리한 젊은병사가 찾아오자, 진짜 그와 창녀로서 섹스를 한다.
잘 생겨서가 아니다. 자기처럼 어리버리하고 학대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하는 그에게서 공감을 느낀 것이다.
여자는 식물인간인 남편에게 와서 "당신이 그를 그렇게 학대했지?"하고 욕을 한다.
남편이 진짜 그 젊은이를 학대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젊은이를 학대했던 그 적군장교나 당신이나 똑같다는
말이다. 학대당하는 젊은이나 자기나 똑같다는 말이다.
여자는 학대당하는 젊은이를 자기 몸으로 위안해주면서, 쾌락을 느낀다. 진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그런
완전충족의 경험이다. 여자는 이제 창녀처럼 진한 화장을 하고, 부르카를 벗고 다닌다.
(혹은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여자는 남자가 자기에게 던져놓고 간 돈들을 바라본다. 그 돈이 탐나 몸을 팔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맥락상 그 돈이 여자로 하여금 몸을 팔도록 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내 생각에,
여자는 자기 몸을 상품의 대상으로 자본주의에 내놓음으로써, 자신을 억압하는 모순된 사회에 저항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이모가 그러했듯 말이다. 그런 자기 섹스의 상품화조차 하나의 진보적인 움직임으로 보일 만큼, 그녀가 처한 사회는 억압적이고 모순되어 있다.)
그리고, 남편에게 자랑스럽게 다가와 독백을 한다.
남편은 불임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모든 책임은 여자에게 쏟아진다.
그대로 있다가는, 자기 이모의 운명이 자기 운명이 된다.
이모는 조카에게 자기 포주를 소개시켜 준다. 여자는 불임인 남편을 속이고,
창녀가 되어 창녀촌에서 손님을 받는다. 그리고, 딸 둘을 낳았다.
정숙하고 순종적인 아내로 보였던 여자는, 실제로는, 창녀가 되었으며 섹스욕구가 왕성하고
남편에게 누구 씨인지도 모를 아이들을 안겨준 거짓말장이였다.
하지만, 여자 잘못은 하나도 없다. 여자는 오히려 희생자다. 여자는 이제 자기를 숨기지 않는다.
자기를 창녀라고 세상에 대놓고 소리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치자, 실은 아까부터 깨어있던 남편은 아내를 목졸라 죽이려고 한다.
여자는 자기 주변에 있던 칼을 집어들어 남편을 찔러 죽인다.
여자의 얼굴에는 기쁜 웃음이 떠오른다. 순종적이고 겁에 질린 듯한 여자는 이미 없다.
여자는 무엇을 극복한 것일까?
영화의 엔딩은 그렇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남편을 찔러 죽였다고 여자 인생의 무엇인가가 바뀌었을까?
여자는 사회가 가장 더럽게 보는, 불륜으로 인한 치정살인을 저지른 데 불과한 것일 지도 모른다.
여자는 자기가 당하는 사회적 억압의 모순을 해결할 만한 능력도 지성도 없다. 여자의 몸부림이라는 것이,
고작 남편을 칼로 찔러죽이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영화 공포의 끝판왕이라는 것이,
이것일 지도 모른다. 억압을 느끼지만, 이것을 극복할 능력이 없이 무력하다는 것 - 이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진짜 공포일 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아주 세련되었다. 영화는 좀 투박한데, 흙냄새 나는 열기와 파워가 느껴지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세련되고 섬세하고 마치 단편소설처럼 단단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가 사회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저항,
약동하는 에너지가 넘친다. 순종적인 아내에서 억압적인 사회의 희생자 그리고 그 희생자로부터 적극적이고 분노에 찬
창녀로 변신하는 캐릭터를 주연여배우는 아주 잘 살려낸다.
하나의 주제를 꼭 붙잡고, 박력있게 끈질기게 추구해나가는 집중력과 파워에는
그저 감탄할 뿐이다.
이 영화는 그 무엇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모순되고 억압적인 사회를 그냥 설득력 있게 풀어 헤친다.
여자도 "나는 희생자"같은 소리는 하지도 않는다. 자기에게 닥쳐왔던 현실을 그냥 숨김 없이 이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관객들에게는,
그녀를 둘러싼 정신적인 감옥이 이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질 수 없을 정도다.
이 영화 속 여자와 그녀가 식물인간 남편과 갇힌 방안은,
예술적 상징이 풍부한 이미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모순된 사회의 모든것이 이 이미지 하나 속에 풍부하게 들어가 있다.
이것은 예술적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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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시프테 파라하니
이란배우인데 영미권 영화 출연도 많아서 유명한 영화로는
아쉬가르 파르하디감독의 어바웃 앨리,
짐 자무쉬감독
의 패터슨,
익스트랙션 시리즈등등 중동계 여자배우중 가장 유명한 배우가 아닐까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영화가 의외로 꽤 세련되었더군요. 팔레스타인에서 만든 영화도 있는데, 아직 못 보았습니다. 그냥 영화의 세계를 우리가 일부분만 보고 사는 것 같습니다.

여배우는 낯이 익는데... 어디서 본건지 기억나진 않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