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수다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재관람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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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영화표 뭉치를 찾아보니, 제가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이하 반지원정대)를 본 게 2001년 12월 31일이네요. 새벽 한시에 시작했던, 아마도 최초 상영회차였을 겁니다. 제게 영화관에서 만났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반지원정대>의 발로그 등장씬입니다. 좋아하는 영화나 여러번 반복관람한 영화도 많고 멋진 장면과의 만남도 적잖이 있었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생에 극장에서 제일 강렬했던 건 역시 절망한 듯한 간달프 앞에 나타나 포효하던 발로그였다는 걸 확장판과 20여년만의 극장판 재관람을 통해서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눈물이 살짝 날 정도로 좋더라구요. 상영정보가 다 날아간(잘 보면 내용은 알아볼 수 있지만...) 옛 티켓을 보면서 다시한번 그때의 감흥이 아직도 유효함을 느끼는 기분이 제법 감개무량하군요.
몇번을 봤는지도 잘 모르겠고 무척 좋아하는 영화지만서도, 확장판보다 짧다곤 하나 3시간여의 상영시간에서 '지루함'을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 다시금 이 시리즈의 대단함을 느낍니다. 반지 3부작의 긴 호흡은 지루함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오히려 '원정대의 긴 여정'에 동참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며, 3년에 걸쳐 이어지는 동안 이런 감흥을 극대화시켜 대미쯤 가면 정말 힘들고 오랜 원정을 함께 끝내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하죠. (그리고 이런 일련의 감정이입은 배우들의 호연과 감독의 연출에 힘입은 것도 큰데, 모리아 시퀀스 다음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원정대원들 같은 건 어설프게 연출하면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기 힘든 장면입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밑도 끝도 없을 터라(단상이라고 해 놓고 벌써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 좀 보라죠;) 가볍게 지엽적인 얘길 풀어놓자면, 일단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음에도 다시금 무척 세심하게 신경쓴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점입니다. '요정의 시각화'라는 면에서 이 작품과 나란히 놓을 영화는 없었다/없다고 생각하고, 갈라드리엘 마님은 가히 '요정의 현신'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강렬함을 선사합니다. 로스로리엔에서 볼 수 있는 마님의 옆 자태는 글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요정의 자태 그 자체입니다.
식물에서 모티브를 따 왔을 요정들의 양식적인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사실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점에서도 꽤나 원전을 의식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카라드라스 산을 넘으며 원정대원들이 거의 아랫도리가 푹푹 들어갈 정도로 눈을 헤치며 악전고투하고 있을 때, 딱 한 사람만 눈 '위'를 걷고 있는 게 대표적인 예죠. 바로 레골라스인데 이건 원전을 그대로 인용한 대목입니다. 사실 원전만큼 사뿐사뿐 걷진 않습니다만서도 일부러 연출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장면이고요. 이번에 보면서 원정대원들이 잠든 사이 마치 프로도를 유인하듯 조용히 맨발로 이동하던 갈라드리엘 마님의 나긋나긋한 걸음걸이에도 신경이 쓰이던데, 돌계단을 내려갈 때의 걸음걸이를 보면 어깨높이를 거의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보입니다. 이건 실제로 시험해 보면 알 수 있는 겁니다만 굉장히 작위적인 움직임이며 사소한 이동에서도 상위요정의 남다른 우아함이랄까 하는 걸 은근히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20년 전 영화임에도 화질이 딱히 떨어진다거나 하는 느낌은 못 받았습니다. 사실 첫 개봉 때도 몇몇 익스트림 클로즈업 장면에선 유난히 인물의 묘사가 디테일해 보인다는 인상이었습니다만, 리마스터링 때문인지 그런 느낌이 한층 증폭된 듯 해서 새삼 놀랐습니다. <반지원정대>의 경우 전 '극장에서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영화의 스케일이나 인상적인 사운드/음악과 별개로 어두운 장면에서의 특수효과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건 모리아 씬에서 좀 두드러지는 단점입니다만 인물 소재를 배경에 합성한 티가 가정용 매체로 볼 때 좀 과해져요. 영화 전체에 쓰인 합성 시퀀스들이 하나같이 다 훌륭하냐 하면 사실 그렇진 않고(당시 신생회사였을 웨타가 역대급 물량의 시각효과를 맡은 만큼 분명 한계도 있었을 겁니다) 전반적으로 고른 완성도를 유지하며 인상적인 장면을 많이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다는 인상인데, 제일 신경이 쓰였던 대목이라 유심히 봤습니다만 확실히 극장에서 볼 때 더 완성도가 높아 보여요.
그런가 하면 익히 알려진 오류 같은 것도 확인하면서 다시 웃었던 게... 대표적인 사례였던 아르고나스의 거대 석상이죠. 짧게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그 위용 덕에 깊은 인상을 주는 만큼 이번 메가박스 오리지널 티켓 이미지로도 사용된 장면입니다만, 정면에서 볼 때는 두 석상이 왼팔을 내밀고 있으나 원정대가 지나간 후 뒤에서 봤을 때는 왼편 석상의 팔이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만들면서 모르진 않았을 것 같고 앞뒤를 맞춰보니 그림이 좀 안 예뻐서 뭉개고 넘어가지 않았을까 짐작할 따름이지만, 이런 요소들조차 오류나 옥의 티로 타박을 놓기보단 오히려 정겹게 느껴질 만큼 반지 3부작의 감흥은 남다르고 또 오래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오티 인질이 생각보다 세서 한편만 볼까... 생각했던 건데, 오늘 보고 맘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든 짬을 만들어서 두편 마저 다 볼 수 있게 해봐야겠네요. 실시간으로 접했던 동시대의 걸출한 작품이 이십여년에 걸쳐 고전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며 함께 나이들어가는 기분도 나쁘지 않네요.^^
- EST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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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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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상에 그런 옥에 티가 있었군요.^^
글 재밌게 잘 봤습니다. 영화의 규모와 제작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높은 완성도의 영화죠.








아르고나스 팔 바뀐 얘긴 들을 때마다 너무 웃깁니다 해리포터 세계관이었다면 석상이 팔 아파서 슬쩍 팔을 바꿔드는 장면이 나왔을 거에요ㅋㅋㅋㅋ 레골라스가 눈 위를 걷는 장면은 볼때마다 왠지 좀 얄밉더군요 다들 눈에 파묻혀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혼자 사뿐사뿐ㅋㅋㅋ


웨타가 당시에 신생회사이긴 했지만, 그당시 기술력은 당대 최고였습니다. 아카데미 시각효과상 1~3편 모두 수상했죠
당시 35mm 필름으로 촬영했는데 이게 4k까지 리마스터가 됩니다. 하지만 vfx는 4k로 제작되지 않았기때문에 4k로 리마스터링되면서 cg와 배경이 서로 이질감을 생기게 하는 것이죠
물론 그럼에도 지금봐도 준수한 그래픽을 보여줍니다! 말씀하신대로 극장에서 어떤 퍼포먼스를 낼지 내일이 너무 기대되는군요:)

뭐 사실 업계 종사자가 아닌 이상 '기술력'의 우위에 대해 우리끼리 내는 답은 일반 관객의 시선 정도의 층위인지라 좀 조심스럽습니다만, 위에도 적었듯이 반지 3부작을 구석구석 살피다 보면 때론 튄다 싶을 정도로 엉성한 장면들이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분량의 시각효과 시퀀스를 딱히 큰 편차 없이 준수하게 소화해냈고 특유의 톤부터 시작해서 판타지 영화의 모범사례를 정립했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회자될 만한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이십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장면장면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만 봐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