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모드
  • 목록
  • 아래로
  • 위로
  • 댓글 9
  • 쓰기
  • 검색

<크리스마스 특선> 이스턴 프라미스(2007)

해리엔젤 해리엔젤
26000 6 9

스포있어요.

 

 

 

 

 

 

aF_FH5TQZvJHQrd_Qh357Q.jpg

 

<이스턴 프라미스>는 런던의 한 미용실에서 어느 마피아 간부가 암살자에게 목이 서걱 베여 죽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잠깐, 크리스마스 특선이라는 훈훈한 제목을 보고 들어오신 분들, 절대로 낚시 아닙니다. 일찌기 차원을 넘나드는 현자, 데드풀이 말했듯이 원래 좋은 러브스토리는 살인에서 시작하는 법입니다.

 

장소를 옮겨, 병원에서 어린 미혼모가 아기를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조산원 안나(나오미 와츠)는 책임을 느껴 아기를 맡아 돌보면서 생모가 남긴 일기장을 뒤져 가족을 찾아주려고 합니다. 생소한 러시아어로 쓰여있는 일기를 번역하기 위해 병원 근처에 위치한 러시아 식당의 사람 좋아보이는 주인장에게 일기를 맡겼는데... 아뿔싸, 이 식당 주인 세묜(아민 뮐러 슈탈)은 사실 러시아 마피아의 대부이자 죽은 미혼모를 인신매매로 끌고온 후 강간해서 임신시킨 바로 그 장본인이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감추기 위해 빼박 증거인 아기마저 죽이려는 저 사악한 마피아 보스를 상대로 한낱 순진한 조산원이 뭘 할 수 있을까요. 이제 그녀와 아기에게 필요한 건 오직 기적뿐입니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예수 탄생설화에 대한 느슨하지만 분명한 알레고리입니다. 처녀수태를 한 마리아는 아기를 입양한 안나로 치환이 가능하고, 일이 어찌됐던 아기를 지키려고 하는 안나의 엄마와 삼촌은 동방박사, 그리고 아기를 죽이려하는 세묜은 헤롯왕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동방박사들에게 왕의 탄생을 알리고 마리아 일행에게 헤롯의 칼날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 천사는 누굴까요. 예, 바로 비고 모텐슨이 연기한 니콜라이죠. 

 

영화의 중반, 조직의 말단 꼬붕이던 니콜라이는 모종의 이유로 정식 마피아 입단 심사를 받습니다. 그가 두목들 앞에서 몸에 새긴 문신을 보여주며 자신의 과거를 밝히자, 그들은 니콜라이의 부모를 모욕하고 그의 과거를 부정하며 오로지 조직원으로서의 삶만을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이 장면이 진정 소름끼치는 이유는 가족과 과거를 모두 부정당한 니콜라이가 앞으로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아까 니콜라이가 예수 탄생설화의 천사역이라고 말씀드렸죠? 천사에게는 부모도 과거도 없습니다. 그저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잘 벼려진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보통 나체로 다니죠. 이어지는 목욕탕 격투씬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니콜라이는 자신을 습격한 다른 조직의 암살자들을 맨손으로 때려 죽여버립니다. 

 

사실 그의 정체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소속으로, 런던내 자국 마피아의 동향을 감시하는 임무를 띄고 잠입한 스파이였습니다. 안나와 아기를 딱하게 여겼지만, 임무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던 그는 이 습격을 계기로 그야말로 숨겨왔던 날개를 펼칩니다. 세묜의 악행을 더는 두고볼 수가 없던 그는 본국과 연락해 바로 세묜을 실각시키고 키릴을 설득해 아기를 구해냅니다.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모든 상황을 정리한 그는 평소처럼 무심한 척 안나에게 아이를 돌려주고, 별일 없었다는 듯한 태도로 뒤돌아섭니다. 그녀에게 품은 호감을 가슴 한편에 감춘 채로요.

 

<이스턴 프라미스>는 철옹성처럼 보이던 악에 맞서 한 생명을 살리려는, 어쩌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측은지심을 가진 한 여인의 작은 선의가 만들어낸 나비효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서늘한 암흑가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시작하지만 끝에는 한조각 양심을 지키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인간들에 대한 구원으로 마무리합니다. 크리스티나라는 상징적인 이름을 가진 아기는 사악한 아버지 밑에서 뒤틀린 남성성을 강요당하던 키릴의 나약함으로 인해 살아남아, 과거 아이를 사산했던 비극을 겪었던 안나와 그 가족들에게 희망의 존재가 됩니다. 평생에 걸쳐 기괴하게 뒤틀린 몸뚱아리에 대한 핏빛 악몽을 그려온 데이빗 크로넨버그 작품치고는 정말 예상외의 해피엔딩이죠. 

 

잔혹한 세상에서 선량한 주인공과 아기가 터럭 하나 다치지않고 무사생존한다는 이 기적같은 엔딩까지의 과정을 복기해보면, 그야말로 구석구석 신의 손길이 미쳤다고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예, 이것이 제가 이 영화를 크리스마스 특선으로 추천하는 이유입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역시 기적극이 제 맛 아니겠습니까?

 

매년 이맘때면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케빈이나 맥클레인 형사와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에 식상해지신 익무 분들이라면, 올해는 러시아에서 온 과묵한 스파이 니콜라이와 한번 만나보시길 감히 추천드립니다. 

 

e6640e01c257b.jpg

 

PS.

이제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페르소나가 된 비고 모텐슨을 비롯해 나오미 와츠, 뱅상 카셀, 아민 뮐러 슈탈 모두 명불허전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작중 러시아 출신이거나 러시아 이민 2세를 실감나게 연기했는데, 막상 그들 중 누구도 러시아쪽 혈통이거나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포인트입니다. 

 

신고공유스크랩

추천인 6

  • 사라보
    사라보
  • Sonatine
    Sonatine
  • 카란
    카란
  • 도삐
    도삐

  • champ3
  • golgo
    golgo

댓글 9

댓글 쓰기
추천+댓글을 달면 포인트가 더 올라갑니다
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profile image 1등
몸에 새긴 문신 설명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러시아 마피아가 가장 살벌하구나, 인식하게 만든 영화였네요.
19:47
24.12.24.
2등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갱영화들 좀 더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폭력의 역사도 그렇고 이 영화도 그렇고 이 장르를 이렇게 잘만드는 감독 요즘 거의 몇 안됩니다.

19:47
24.12.24.
profile image
min님

그러게 말입니다.  이 작품도 속편 계획이 있었는데 흥행성적이 안좋아서 접었다고 하더군요.

16:32
24.12.25.
3등
이영화를 예수탄생 설화에 비교 설명하시다니.
전혀 생각못하다가 설득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20:12
24.12.24.
profile image
이 영화 정말 좋아합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12:23
24.12.25.
profile image
글 잘 쓰시네요 부럽습니다. 영화의 장면 장면이 다 떠오르네요. 두번째 볼때는 더욱 감탄하면서 본 놀라웠던 영화였어요
10:59
24.12.26.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에디터 모드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공유

퍼머링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로데오] 시사회에 초대합니다. 8 익무노예 익무노예 25.04.29.11:58 2225
공지 [케이 넘버] 시사회에 초대합니다. 9 익무노예 익무노예 25.04.24.11:24 4438
HOT 천국에서 지옥까지 - 공식 티저 예고편 [한글 자막] 2 푸돌이 푸돌이 3시간 전13:44 849
HOT 드니 빌뇌브 ‘듄 메시아‘ 9월 촬영 시작 NeoSun NeoSun 10분 전17:17 98
HOT 이동진 평론가 ‘썬더볼츠’ 한줄평 1 NeoSun NeoSun 19분 전17:08 263
HOT 개인적으로 꼽는 현 마블 MCU의 최대 문제점 4 Batmania Batmania 48분 전16:39 455
HOT 세바스찬 스탠, 루크 스카이워커 역 제안에 “마크 해밀의 자... 1 카란 카란 1시간 전16:24 295
HOT (*스포) <썬더볼츠*> 본편에 담기지 않은 버키, 알렉... 카란 카란 1시간 전15:48 425
HOT 마동석 거룩한 밤 : 데몬 헌터스 1 e260 e260 2시간 전15:23 380
HOT 조정석 전도연 백상예술대상 e260 e260 2시간 전15:22 479
HOT 61회 백상 영화부문 작품상 - 하얼빈 5 볼드모트 볼드모트 2시간 전14:58 553
HOT 썬더볼츠가.. 흥행 안좋네요 9 울프맨 2시간 전14:28 1797
HOT 쿠팡 플레이) 살렘스 롯 - 간단 후기 2 소설가 소설가 4시간 전12:59 953
HOT <마인크래프트 무비> 100만 관객 돌파 2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5시간 전12:22 809
HOT 슈퍼스타와 그 케릭터 4 단테알리기에리 7시간 전10:05 717
HOT 백악관, “외국 영화에 대한 관세와 관련해 아직 최종 결정이... 6 NeoSun NeoSun 7시간 전09:59 995
HOT 탐 크루즈 ‘미션임파서블 파이널레코닝’ 뉴스틸 2 NeoSun NeoSun 8시간 전09:27 939
HOT 스파이크 리 ‘하이스트 2 로우스트’ 첫 티저 - 애플TV 2 NeoSun NeoSun 8시간 전09:22 629
HOT 쿠팡 플레이 좋네요 4 바람계곡 8시간 전09:17 3522
HOT ‘오징어게임 3‘ 첫포스터, 스틸들, 예고편 2 NeoSun NeoSun 8시간 전09:04 2235
HOT 오징어게임 시즌 3 티저영상에 이분이 어떻게...? 10 jokerr jokerr 8시간 전08:39 3954
HOT 테오 크리스틴-오마 사이-뱅상 카셀-프랑수아 시빌,<뒤마... 1 Tulee Tulee 9시간 전08:09 499
1174867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4분 전17:23 61
1174866
image
NeoSun NeoSun 10분 전17:17 98
1174865
image
NeoSun NeoSun 19분 전17:08 263
1174864
image
NeoSun NeoSun 21분 전17:06 117
1174863
image
NeoSun NeoSun 22분 전17:05 58
1174862
normal
45분 전16:42 215
1174861
normal
Batmania Batmania 48분 전16:39 455
1174860
image
카란 카란 51분 전16:36 210
1174859
image
카란 카란 1시간 전16:24 295
1174858
image
카란 카란 1시간 전15:48 425
1174857
image
e260 e260 2시간 전15:23 264
1174856
image
e260 e260 2시간 전15:23 380
1174855
image
e260 e260 2시간 전15:22 479
1174854
image
21C아티스트 2시간 전15:01 474
1174853
normal
볼드모트 볼드모트 2시간 전14:58 553
1174852
image
선우 선우 2시간 전14:37 1207
1174851
normal
울프맨 2시간 전14:28 1797
1174850
image
카스미팬S 3시간 전14:21 189
1174849
normal
토루크막토 3시간 전14:11 516
1174848
normal
푸돌이 푸돌이 3시간 전13:44 849
1174847
image
소설가 소설가 4시간 전12:59 953
1174846
image
넷플마니아 넷플마니아 5시간 전12:22 809
1174845
image
NeoSun NeoSun 6시간 전11:19 1359
1174844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6시간 전11:07 769
1174843
image
호러블맨 호러블맨 6시간 전11:02 734
1174842
image
NeoSun NeoSun 6시간 전11:01 855
1174841
image
단테알리기에리 7시간 전10:05 717
1174840
image
NeoSun NeoSun 7시간 전10:04 449
1174839
image
NeoSun NeoSun 7시간 전09:59 995
1174838
image
NeoSun NeoSun 7시간 전09:48 763
1174837
image
NeoSun NeoSun 7시간 전09:32 728
1174836
image
NeoSun NeoSun 8시간 전09:27 939
1174835
image
NeoSun NeoSun 8시간 전09:22 629
1174834
image
바람계곡 8시간 전09:17 3522
1174833
image
NeoSun NeoSun 8시간 전09:04 2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