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lked with a zombie (1943)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 제목이 좀 찌질하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엄청나게 지적이고 세련된 영화다.
발 류튼이라고 콜럼비아대학을 졸업하고 엄청나게 박식 지적인 사람이 있었다. 그는 훌륭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으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우뢰매 수준 영화제작 뿐이었다. 우리의 발 류튼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우뢰매 영화를 자기가 만들고 싶어하는 영화로 만들었다.
가령 유령선같은 영화를 만들라고 하면, 자기가 원하는 휴먼 드라마를 찍고 영화 마지막에 가서, 인생이란 유령선을 타고 가는 것과 같다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이다. 이거 위험한 거다. 영화가 성공하는 한은, 영화사도 발 류튼의 이런 짓을 넘어가주지만, 영화가 실패하는 날에는
발 류튼은 그냥 짤리는 거다. 그리고 실제 그의 최후는 이랬다.
발 류튼은 제작자였고, 그는 명감독들과 일했다. 쟈크 투르뇌라는 명감독이 발 류튼과 단짝이었고, 사운드 어므 뮤직, 더 헌팅으로 유명한 로버트
와이즈 감독도 발 류튼 밑에 있었다. 어느날 발 류튼은 좀비영화를 만들어야하게 되었다.
우리의 발 류튼은 제인 에어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좀비영화를 만들기로 하였다. 혹자는 이 영화,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를 가장 잘 만든
제인 에어 영화로 꼽기도 한다. 나도 거기 동의한다. 제인 에어는 거대한 소설이다. 소설로 쓰여진 것을 그대로 영화로 옮겨놓으려 하면 백전백패다.
소설이 쓰여지는 방식과 영화가 구성되는 방식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제인 에어를, 어느 간호사가 열대의 플랜테이션에 가서
뜨거운 밤 동안 사탕수수밭을 헤메는 강렬한 이야기로 바꾸었다. 영화라는 미디어에 맞는 제인 에어 이야기는, 이편이 더 맞다.
캐나다의 간호사 벳시는 순진하고 꿈많은 처녀다. 그는 서인도제도 농장주 폴의 아내 제시카를 돌보는 직업을 맡아 바다를 건넌다.
뱃전에서 그녀는 밤바다를 본다. "바다에서는 은은한 신비로운 빛이 뿜어나오고, 날치들이 바다 위로 뛰어올라 여기저기 날고 있어. 참 아름다와."
그때 누군가 조롱하듯 말한다. "아름답지 않소. 저 바다가 빛나는 이유는, 바다 밑에 플랑크톤이 죽어있기 때문이지. 날치가 나는 이유도
환희 때문이 아니오. 다른 큰 고기에게 잡아먹힐 위기라서 공포에 도망가는 것이오." 그 남자가 바로 폴이다.
나는 이 장면을 아주 좋아한다. 물론 진짜 바다를 건너가는 장면 찍을 예산은 없고, 그냥 우뢰매 수준 셋트 하나 놓고 찍은 거다.
하지만 굉장히 시적이고 훌륭한 대사 때문에, 마치 두 사람이 광활한 바다를 보며 말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바다(?)를 보며 저런 대사를 하는대
드넓은 바다가 안 느껴지면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천재적이다.
폴의 저택에 도착한 벳시는 폴의 아내 제시카가 움직이는 식물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감각도 의식도 없이, 마치 몽유병환자처럼 한 방향으로 걸어간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움직이는 나무토막이라고 해야 하나?
제시카는 아주 매혹적인 캐릭터다. 일체의 의식 감각이 사라져버린 아주 매혹적인 환상 그 자체다. 의사는 열병이 그녀의 신경을 다 태워버렸다고 한다.
순진한 벳시는 폴과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다음, 벳시가 한 일은 "제시카만 죽으면 폴과 나는 행복할 수 있어"가 아니다.
"사랑하는 폴을 위해 그의 아내 제시카를 꼭 살려낼 거야"다. 순진한 아가씨다. 하지만 영화 속 제인 에어처럼,
강단있고 현명한 아가씨이기도 하다.
대저택같은 곳에 로케할 돈이 있을 리 없다 우뢰매 수준 셋트에서 찍은 것이다. 하지만 위 사진에 보이는 계단이 있는 방을 보라.
굉장히 환상적이고 으스스한 분위기가 잘 살아있다. 상상력과 비젼만 있으면 돈 그거 필요 없다.
갑판 하나 달랑 갖다놓고 광대한 바다의 그 공간감을 화면 안에 채워넣을 수도 있고,
우뢰매 수준의 계단 하나 갖다놓고 신비한 여자가 방황하는 어둔 저택의 복도를 그려낼 수도 있다.
이것보다 한술 더 뜨는 명장면이 등장한다. 영화사상 유명한 명장면이다.
벳시는 제시카를 데리고 흑인들의 대마법사가 산다는 곳을 한밤중에 찾아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엄청 넓은 사탕수수밭을 헤치고서.
사탕수수는 사람 키보다도 크고 밭은 끝이 없다. 벳시는 제시카의 손을 잡고서 그 공포스런 사탕수수밭을 헤멘다.
스케일이 어마어마하고 아주 환상적이고 공포스런 장면이다.
이것을 우뢰매 수준 셋트 하나 갖고 만들어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가......
대마법사는 폴의 어머니였다. 의사인 그녀를 원주민들은 마법사로 생각한 것이었다.
폴의 어머니는 비밀을 갖고 있다. 폴의 아내 제시카는 폴의 동생과 불륜을 저지르다, 둘이 함께 도망가려고 했다. 폴의 어머니는 제시카를
용서할 수 없어서, 원주민들의 축제기간 동안 제시카가 좀비가 되길 기도했다. 그러자, 제시카가 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시카는 정말 좀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의사 말대로 그냥 병에 걸린 것일까? 발 류튼 트레이드마크다. 애매하게 한다. 이것도 발 류튼의 영리한
발명이다. 예산이 영화가 하도 작으니까, 이런 식으로 해서 영화의 내면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발 류튼은 여러모로 천재였던 사람이다.
폴의 멋진 대저택은 흑인 원주민들과 사탕수수밭에 포위되어있다. 흑인들의 마을에서는 북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그들은 좀비가 되었다고 믿어지는 제시카를 데리러 찾아올 것이다.
이 영화, 저예산으로 셋트에서 많은 장면을 찍은 영화인데, 현지 로케 대하드라마 느낌이 난다.
이 영화는 잘 만들었다 수준을 넘는다. 심형래가 영구 아트 스튜디오에서 대하드라마 서유기를 실감나게 찍은 수준이다.
거기에다가 영화가 시적이고 문학적이다. 아주 우아하고 세련되었다.
이 영화를 보려는 목적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 확인해 보자, 제인 에어 영화화 중 가장 걸작이라니 한번 확인해 보자, 훌륭한 호러영화라니
한번 감상해 보자, 우아하고 세련된 문학영화라니 이를 감상해 보자 등.
당신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이 영화가 걸작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추천인 1
댓글 4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굿! 개인적으로 이런풍의 영화는 잘안보지만 글은 무척이나 재밌네요 ㅎㅎ
발 류튼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있는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