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 (1967) 아련한
오늘날 메밀꽃 필 무렵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물리적 거리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길 위를 평생 터덜터덜 걷다가 그 위에서 힘이 다해 죽는다"가 주는 비극성을 오늘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가령 이렇게 상상해 보자. 우리가 교통도 통신도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이런 시대에서는 물리적 거리가 아주 큰 의미를 가진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 지 모른다. 한번 떠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르고,
두번 다시 가족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만날 수 없을 지 모른다. 이때 이별이란 것의 의미는 아주 특별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도 어찌할 수 없는 그 그리움과 동경 때문에 떠나가야만 한다.
내가 가고 있는 그 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고 있는 자연은, 현실적인 것이라기보다 전설과 신비, 아름다움과 꿈의 세계다.
나는 그 속을 걷는다. 걷다가 힘이 다해 길 위에서 죽을 때까지 그 속을 걸어갈 것이다.
이것이 메밀꽃 필 무렵의 세계다.
"오늘도 하룻길은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을 못 잊겠네"
의 세계다.
세명의 친구 - 박노식과 허장강, 김희갑은 모두 이런 존재들이다. 장터에서 장터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다.
가족도 친구도 사랑하는 사람도 다 사라졌다. 그들은 봄아지랑이 따라 한여름 짙은 청록빛 잎 따라 가을 단풍 따라
떠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이 영화 주제는 이것이다. 허장강은 몹시 아프다. 곧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길 위를 떠다니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길 위를 걷다가 죽을 셈이다. 두 친구 박노식과 김희갑은 이런 친구를 말리지도 않는다.
그들의 숙명을 알기 때문에.
박노식의 과거가 보여진다. 그는 처녀 김지미를 만나 사랑을 했고, 모든 것을 바쳐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가난한 그녀의 집에서는 김지미를 팔아버렸고, 박노식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김지미를 찾아헤맸다.
오늘날 교통, 통신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이해 못할 것이다. 하지만 박노식은 김지미 종적을 알 수 없다. 물어 물어 짐작해서 김지미의 뒤를 따라가지만
엇갈리기만 할 뿐 도저히 만날 수 없다. 그렇게 수년 동안 찾아 헤메다가 박노식은 포기하고 다시 장똘뱅이가 된다.
그녀는 저 산 너머 강 건너 보이지 않는 구름 너머 어디에 있을까? 그는 그리워할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런데 장똘뱅이 청년 이순재와 싸움이 붙는다. 미남 청년 이순재에게 아낙들이 몰려들고, 고객들을 가로채이는 것이 아니꼬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길 위에서 떠다니는 존재들이니 더 싸운들 뭐하랴. 그들은 한밤중에 다시 만나 메밀꽃이 무성한 길 위를 함께 걷는다.
이 길은 우리가 지금 아는 그 길이 아니다. 어디인지 모를 신비로운 장소로 인도하는 길이요, 엇갈리면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 걸어가고 걸어오는 길이다. 한번 이 길을 떠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길이다. 그들이 그 길 위에서
죽어갈 그 길이다. 이런 길에서 만난 동지인데, 마음이 통하지 않을 리가 있을까.
이순재는 자기 신세를 이야기한다. 자기 홀어머니는 무지하게 고생을 해서 자기를 키웠다고 한다. 자기도 어릴 적부터 괄시를 많이 받고.
자기 홀어머니를 위해 장똘뱅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점점 이순재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박노식은 이순재가 자기 아들이고,
이순재 어머니가 김지미라는 사실을 눈치채게 된다.
이것은 우연 이상이다. 기적이요 운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허장강은 길 위에서 죽는다. 김희갑은 허장강의 죽음을 보고, 어딘가 있을 자기 가족을 찾아가겠다고 떠난다.
그들이 이 길 위에서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것은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다.
박노식과 김희갑은 이제 다시는 만나거나 소식을 전할 일이 없을 것이다.
박노식은 이순재를 따라 김지미를 찾으러 간다.
액션스타로서만 알려졌던 박노식의 섬세한 멜로연기, 내면연기가 대단하다. 박노식이 대배우였음을 증명한다.
김희갑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섬세한 코메디연기로 영화 한 축을 지탱한다.
이효석의 소설은 단편소설이라 영화 한 편 분량이 안 나온다. 이것을 억지로 늘리려 하면
영화는 스토리가 엉망인 삼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리하게도 엄청 많은 스토리를 붙이지 않는다. 아주 요령있게, 이효석 원작의 세련되고 간략한 분위기를 잘 살리면서
에피소드들을 덧붙인다. 영화가 매우 탄탄하다. 늘어지거나 하는 부분 없이 매우 압축되었으면서도 야무지게 구성되었다는 생각이다.
걸작이다. 리메스터링이 되지 않아, 영화 아름다움을 100% 감상할 수 없는 것이 매우 아쉽다.
이 영화가 가장 성공한 이유는, 전근대사회의 길이라는 이미지를 너무나 잘 잡아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동경과 꿈, 그리움과 신비가 넘치는 그 길을.
이것은 휴먼 드라마가 아니다. 이것은 그 길에 대한 이야기다. 이 길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수십년 동안 못 만나는 것도,
어쩌다가 메밀꽃 핀 길을 걷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다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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