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1968) 이만희의 잊혀진 작품
이만희 감독이 만들었다가 당국의 검열에 걸려 그냥 사장된 것을 최근 발굴한 것이라고 한다. 황량한 서울의 분위기와 그것 못지 않게 황량한 연인들의 내면을 시적으로 그렸다. 저 화면을 보면 굉장히 신선하고 참신하고 투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연인들이 목적 없이 헤멤에 따라 서울의 황량한 풍경은 확장된다. 관객들은 알게 된다. 스크린 저 바깥으로 이 황량함, 외로움은 멀리 멀리까지 확장되어 있음을. 저 연인들은 황량한 공간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걸작이 되기에는 좀 모자란 감이 있다. 저 화면이 다이기 때문이다. 처음 저 장면을 보았을 때는 엄청난 영화를 보겠구나 하고 기대했다. 하지만 저 장면이 다일 줄이야. 저 멋진 화면을 시끄럽게 채우는 것은 신파조 멜로디이다. 왜 아쟁이 앵앵 우는 것처럼 청승맞고 슬퍼하라 하고 강요하는 듯한 음악. 그게 한 30초 정도 지속되는 멜로디인데, 이것을 저 화면 내내 무한반복한다. 이 멜로디를 영화 내내 수십번 들은 것 같다. 그냥 음악을 다 빼버렸으면 저 황량한 서울 공간을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철저한 정적만이 남았을 텐데. 그럼 악몽 속을 방황하는 것같은 저 연인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보여졌을까?
신성일은 커피값도 없는 청년인데 전지연과 사귀다가 덜컥 임신을 시켜버린다. 경제적으로 낳을 형편도 안되지만, 더군다나 전지연의 건강 때문에 중절수술을 해야한다. 커피값도 없는데 수술비를 어떻게 장만할까? 신성일은 필사적으로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려 한다.
이만희는 화면과 이미지를 표현적으로 어떤 미학적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느낌을 주는 감독이다. 저 위의 황량한 화면도 이 젊은 연인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만희는 작가다.
하지만 한계도 있다. 신성일이 만나는 친구들은 현실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캐리커쳐같다. 흥미가 안 생기는 존재들이다.
가령 좋은 대학을 나왔는데 취직이 안돼 억만이라는 술집에서 외상술이나 축내고 있는 친구. 뭔가 생생하게 이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난 대학도 나왔는데 사회가 문제야" 같은 식으로 문어체적이고 평범한 대사를 읊는다. 존재감이 없다. "자, 마시자, 취하자."이런 대사 좀 낯뜨겁다. 캐릭터가 속이 꽉 찬 것이 없고 공허한 감이 있다.
신성일도 절박한 상황이면 절박하게 행동해야 할 것 아닌가? 느끼하게 폼을 잡고 느릿느릿 대사를 한다.
이런 종류 영화들은 엄청난 속도감을 팍팍 살려서 처음부터 끝까지 질주해야하지 않을까? 이 영화는 도무지 에너지가 없다.
친구의 돈을 훔친 신성일은 이 돈으로 지연의 임신중절을 하게 한다. 하지만 쫄보였던 그는 이 순간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빠져나와 다른 여자를 만나 유혹한다.
자기 자신을 자책하면서 경멸하면서 동시에 낯선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 - 뭔가 심오한 현대인의 내면을 나타낸다기보다 그냥 찌질해보인다. 신성일의 캐릭터가 잘 구축되지 않은 탓이다. 아니면 신성일 내면의 심연을 감독이 파고들어가기에는 역량이 부족했거나.
하지만 결국 기껏 유혹한 여자도 내팽개치고 지연을 찾아 병원으로 온 신성일은 그녀가 수술 중 죽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황량한 서울의 밤거리를 휘청휘청 걷는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다. 그런데 역시 화면을 가득 채우는 30초짜리 앵앵거리는 슬픈 멜로디. 무한반복된다. 화면이 스스로 이야기하게 좀 내버려두라 하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지연의 나레이션. "우리 결혼은 교회당에서 할까요? 드레스는 뭐로 할까요? 빨간 벽돌집에서 살아요." 손이 오그라든다. 거기에다가 더해지는 앵앵거리는 멜로디. 신성일이 여기서 "지연이. 흑흑."이러면서 걷는 장면이 겹친다. 이만희 감독의 센스에 대해 회의가 든다.
이 영화를 엄청난 걸작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감각은 분명히 있지만 지성이 좀 부족한 것 같고 통찰력도 부족한 것 같다. 모더니즘영화로서 수작 정도를 만들어냈지만 단점도 만만치 않다.
이 영화 단점이 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걸작이다 혹은 아는 사람이 보면 걸작이다 하는 소리들을 하는데, 이정도 단점이 있으면 자세히 뜯어볼 이유 자체가 없다. 선셋대로는 영화 초보자가 보아도 걸작이라는 것을 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성일은 이제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라 다짐한다. 자기 반성이다. 그는 일요일이면 밖에 나갔고 여자를 임신시켰고 여자를 죽였다. 그리고 비겁하게 이를 회피하려 하였다. 신성일은 내게 이제 일요일은 없다 하고 다짐한다. 그는 과연 그렇게 했을까? 아니면 잠깐의 결심 후에 다시 타성에 젖은 생활에 빠져들었을까? 이 마지막 장면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엔딩이 생각난다.
P.S. 만추도 이정도 영화가 아닐까? 만추의 제작자였던 호현찬인가 어느 분이 회고하기를, 만추가 사라져서 과대평가되는 것이지, 분명 단점도 있는 영화였다고 했다. 흠, 영화를 볼 길 없으니 속단하기 어렵지만, 이 영화는 내게 그만큼 실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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