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발탄 (1961) 네가 탑이다.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오발탄과 가장 비슷한 오늘날 영화를 꼽자면 유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이다. 날 것 그대로 거친 느낌, 영화를 가득 채우는 울분과 에너지, "신이여 왜 나를 낳았습니까?"하고 절규하는 듯한 절망과 암울함 등이 영화에 가득하다. 우리나라 영화사 탑 중의 탑으로 꼽히던 이 영화에 대해 오늘날 사람들은 구성이나 그밖의 면에서 완벽한 그런 영화겠지 하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가난한 시기에 36세 젊은 감독이 돈에 쪼들려가며 만든 영화가 완벽할 리 없지 않은가? 이 영화는 분노와 절망, 폭발하는 에너지로 가득한 작품이다. 거친 입자가 느껴지는 꺼칠꺼칠한 작품이다.
영화가 그리는 인물들이 좌절하고 절규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좌절하고 절규한다. 영화는 근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서, 근대화의 상징인 낙관주의, 합리주의가 이 영화에는 없다. 길이 보이지 않던 암흑의 시기에 그 시대를 반영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유현목 감독은 "걸작 하나 만들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아니라 " 이 암울한 시대를 증거할 목소리 하나 만들어야겠다"하는 생각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적 완성도가 아니라 "시대를 정직하게 반영함" 그리고 "현실을 충실하게 보여줌"이 목표였던 영화다. 리얼리즘이나 다큐멘터리 기법이 사용되었다 하는 평가가 있는데, 감독이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려는 목표가 있었다기 보다는. 감독 자신의 내적인 욕구가 리얼리즘 영화로 구현되었다 하는 이야기가 더 맞지 않을까?
김진규의 열연이 빛난다. 그의 집안은 육이오 때 재산을 모두 놓고 피난와서 가난하게 산다. 김진규는 서기로 취직해서 입에 풀칠이나 간신히 할 정도이고, 노모는 정신이 나가서 맨날 "가자, 가자"만 외친다. 김진규의 아내는 너무나 힘든 나머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감정도 이성도 없는 삶을 산다. 김진규는 치통을 앓고 있지만, 치과에 갈 돈이 없어 며칠째 앓고만 있다. 이범선의 원작에는 여기까지지만, 단편소설을 장편영화로 그대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김진규의 동생은 정말 제임스 딘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젊은 최무룡이 맡았다. 최민수의 아버지로 나이 든 모습만 보았던 내게, 젊은 최무룡은 그 분위기나 연기가 제임스 딘을 연상시켰다. 최무룡은 이런 상황을 반전시킬 유일한 방법은 범죄뿐이라고 생각하고, 은행을 털 생각을 한다.
이 영화는 김진규의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의 원탑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여러 등장인물들을 통해 사회 전반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각각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찍는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꿈도 희망도 없는 영화다. 하지만 그들을 이런 비극으로 이끈 것은 운명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요 사회다. 최무룡은 은행을 털고 도망가다가 경찰에 잡히자 절망해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며 붙잡히고, 김진규는 치과에서 이를 뽑고 절망해서 길을 휘청휘청 걷다가 "나는 신의 오발탄이다"하고 중얼거리며 죽는다(?). 이 영화 마지막에서 김진규가 입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절망한 표정으로 휘청휘청 걷는 그 장면은 진짜 김진규 최고의 연기이며 영화사 명장면 중 하나이다. 젊기에 할 수 있었던 연기이고 젊기에 찍을 수 있었던 장면이다. 세상을 향해 날을 잔뜩 세우고 절규하는 그런 연기 말이다.
카메라를 들쳐업고 나서서 당대의 암흑의 심장을 찌르겠다 하는 젊은 감독의 패기와 젊은 배우들의 훌륭한 열연은, 그냥 걸작을 만들겠다 하는 것보다 더 야심적이고 난이도 높아 보인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우리나라 영화사 탑인 걸작이 되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워보인다. 물론 우리나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영화들도 많다. 하지만 다음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가 얼마나 될까?
1) 거장급 감독이 거장급 연출능력을 보여줄 것 2) 당대의 사회 구석구석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것. 이것이 산산히 흩어지지 않고 꽉 짜여진 전체를 이루도록 조율할 것 3) 역대급 각본이 있을 것 4)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현장감을 보여줄 것 5) 김진규같은 영화사 탑급 배우들의 열연이 있을 것 6) 당대 시대정신의 핵심을 기적적으로 잡아낼 것. 당대 암흑의 핵심 중의 핵심을 관객들이 들어가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할 것.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술적인 목표의 스케일과 높이, 당대 시대정신을 붙잡은 것, 숱한 대배우들의 열연, 영화의 집중도 및 완성도 등에서 이 영화와 비견되는 영화는 없는 것 같다.
P.S. 신상옥 감독이 비스무리한 영화를 찍었다. 그의 최초 작품 악야이다. 신상옥 감독 본인이 리얼리즘 작품이라고 했고, 내용을 봐도 그렇다. 신상옥 감독이 카메라 하나 들고 나서서 리얼리즘 영화를 찍었다는 것이 새롭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는 이후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하고 그런 방향으로 틀지만. 신상옥 감독 회고에 따르면 이 영화 악야는 대중적이지 않고 예술적이며 리얼리즘 영화라고 한다. 그는 악야의 작품성에 대해 은연중 자부심을 보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하나의 오발탄을 영영 잃어버린 셈이다. 신상옥 감독의 느와르이자 리얼리즘 걸작 지옥화를 보면 그런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P.S. SK에서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배우들의 땀구멍까지 보일 정도로 4K로 리매스터링했다고 하는데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다. 유튜브같은 데나 아니면 돈 내고 다운로드라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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