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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저리> 픽션이 현실로 넘어오는 순간의 섬뜩함

차민 차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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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에서 미저리 시리즈의 작가로 유명한 폴 셸던은 매니저와 대화를 한다. 폴은 미저리를 죽이고 시리즈를 끝내기로 결심했다고 말을 하고, 그의 매니저는 성공한 시리즈를 왜 끝내려고 하냐며 폴을 만류한다. 하지만 폴의 마음은 굳건하다. 그가 어떤 사정이 있어서 미저리를 끝내려고 하는지는 영화에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폴은 미저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미저리 시리즈를 제외한 소설은 제대로 써본 적도 없다며 매니저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미저리>의 빌런 애니 윌킨스는 그런 폴의 공포가 그대로 형상화된 존재다. 그녀는 '자신이 쓰고 싶어 하지 않는 소설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독자'다. 애니는 주인공의 행보에 개연성이 없다며 소설을 다시 쓰게 만들거나, 소설 속 인물들이 상스러운 말을 쓰면 안 된다고 윽박을 지른다. 그녀는 작가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독자다. 예술가가 자신의 비전을 실현할 수 없게 만드는 존재.

 

이렇게 독자를 향한 작가의 공포를 다룬다는 점에서 <미저리>가 다루는 정서는 더없이 현실적이다.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현실에 있을 법한 일은 아니지만, 애니가 보이는 독자의 심리는 우리가 주변에서 수도 없이 보아왔던 심리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작가를 두고 “어디 묶어놓고 글만 쓰게 하고 싶다”고 적어놓은 글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농담으로 던지는 수사적 표현이다. 그들이 진짜로 작가를 납치해서 묶어 놓고 글을 쓰게 할 리는 없다. 하지만 농담의 근저에는 항상 발화자의 마음이 있다. 작가가 글만 썼으면 하는 마음, 소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개조하고 싶다는 발화자의 마음은 진심이다. <미저리>는 그런 독자의 마음이 극단적인 형태로 실현된 영화다. <스타워즈>를 찍으면서 루크나 한 솔로를 함부로 죽일 수 없고, <어벤져스>를 찍을 때 아이언맨에게 장렬한 죽음을 선사해야 하는 작가의 공포가 <미저리>에 있다.

 

애니가 공포스러운 독자의 모습을 대변하기에 그녀에게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애니가 폴의 모든 습관과 행적을 환히 꿰고 있기 때문이다. 폴은 몇 번이고 탈출의 기회를 엿보지만 그의 탈출 시도는 번번이 저지 당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애니의 집에서 탈출을 할 수 있었는가. 중반에 식칼을 바라보는 폴의 표정과 후반에 기름통을 엿보는 폴의 표정에 그 답이 있다. 초반에 폴은 애니의 말을 순순히 따르고 그녀가 바라는 대로 글을 쓰면서 호시탐탐 빠져나갈 기회를 엿본다. 그는 탈출을 감행하기 위해 약을 모아 애니의 와인에 타지만 애니는 폴이 몰래 방을 빠져나갔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와인을 고의적으로 넘어뜨린다. 이때 천연덕스럽게 “이건 없던 일로 하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는 애니의 표정과 대사는 다분히 의미심장하다. 폴은 심장을 쓸어내린다. 그는 다시 한번 기회를 엿보다가 대담한 두번째 시도를 한다. 방을 빠져나가 식칼을 훔쳐 오는 것이다. 식칼을 챙기는 폴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다. 그 순간에 폴은 애니에게 식칼을 들키는 순간 무슨 일을 당할지를 상상하고 있다. 그 시도는 역시 폴이 애니의 손바닥 안에 있기에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후반부에 기름통을 바라보는 폴의 표정은 다르다. 그는 애니를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 이때의 폴은 이판사판이란 심정으로 애니와 결전을 벌여서라도 자신의 글을 지킬 생각이다. 중반에 애니를 공격하기 위해 식칼을 챙겼던 것과 달리 폴이 기름통을 챙기는 것은 애니의 신체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다. 공격의 대상은 글이다. 애니에게 기름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애니의 취향대로 써진 글에 기름을 뿌리는 것. 이 간단한 전환으로 인해 권력의 전이가 이루어지고, 글에 매달리는 애니에게 빈틈이 생긴다. 이 순간은 폴이 독자와의 타협을 완전히 무시하는 순간이다.

 

18개월 후, 애니의 집을 탈출한 폴은 미저리가 아닌 다른 소설을 쓴다. 미저리 시리즈는 대중들에게는 인기를 끌었지만 비평가의 인정은 얻지 못했었다. 하지만 감금 사건 이후로 폴의 소설은 권위와 비평가의 찬사, 상장을 모두 휩쓸어가게 된다. 매니저와 식사를 하며 폴은 애니의 집에 감금당했던 끔찍한 경험이 한편으론 자신에게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미저리 시리즈에 얽매이며 고통받던 그는 그 경험으로 인해 팬을 가차 없이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폴은 한 여성 팬에게서 애니의 환영을 본다. 그녀는 애니가 전반부에 했던 대사를 그대로 폴에게 읊는다. "전 당신의 no.1 팬이에요". 폴은 전반부에 애니에게 그 대사를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소를 짓지만, 그의 미소는 애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 보였던 미소와는 어딘가 다르다. 억지로 지어낸 듯한 미소. 이 표정은 찰나의 순간에 오프닝의 폴과 엔딩의 폴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의 불길한 표정을 비추며 <미저리>는 막을 내린다. 이 장면은 내가 근래에 본 가장 섬뜩한 엔딩이다. 폴이 애니의 집에서 겪은 일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일이 아니지만, 여성 팬이 작가에게 "전 당신의 no.1 팬이에요."라고 말하는 엔딩 시퀀스는 실제로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세상의 수많은 애니 윌킨스를 떠올리게 하는 엔딩. 어디까지나 픽션 속의 스릴러였던 <미저리>는 그 순간부터 현실로 스멀스멀 넘어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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