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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예술에 새겨 넣은 불같은 사랑

행인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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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두 번 보고 머릿속에서 아무리 반복 재생을 해봐도 마리안느(노에미 멜랑)와 엘로이즈(아델 에넬)가 서로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한 기억이 없다. 계급의 차이를 버리고 친구처럼 지내던 소피(루아나 바야미)에게도 둘의 관계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 또한 의문이 가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그다지 멜로영화를 접하지 못했기에 ‘사랑해’라고 말하는 일이 다소 진부한 연출이 되어버린 거라면 할 말이 없지만, 앞서 언급한 일들이 결말을 알고서도 불같은 사랑을 나눴던 그녀들이 가졌던 한계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시대를 다루는 퀴어 영화에서 사랑의 형태를 언어와 육체로 표현하는 것에 망설이는 인물들이 떠올랐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들어봤어?”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는 들었어.” [캐롤]에 나오는 대사다. 테레즈와 캐롤이 눈이 마주치는 첫 순간 관객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 두 명이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둘 사이의 사랑 고백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캐롤의 입을 통해 한 번만 나올 뿐이다. 동성애가 정신질환으로 치환되던 1950년대 뉴욕에서는 그 감정에 언어를 붙이는 일 자체가 터부시되었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는 것, 혹은 제대로 된 이름을 갖지 못하는 많은 것들은 결국 그 실존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 [모리스]에서 모리스와 클라이브는 둘 사이의 감정을 확인하고도 육체적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 남성들 간의 사랑은 오로지 플라토닉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클라이브의 주장은 그 당시에 사회적 통념에 의해 가로막힌 자신의 감정에 대한 변명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육체를 욕망하는 일도 금기 시 될 때 그 감정들은 다른 길을 통해 표출된다. [캐롤]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많은 경우 장애물에 가려져 있다. 온전한 자신만의 공간을 가질 수 없는 인물들에게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바라보는 걸 멈추지 않는다. 모리스는 결국 자신의 감정에 변명하지 않는 인물을 선택한다. 창문에 가려진 클라이브를 비추는 카메라는 결국 외딴섬에 고립된 건 모리스가 아니라 그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에게는 시선을 가리는 닫힌 공간도 없고 자신의 감정에 대한 변명도 없다.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응용하는 동시에 전복시키는 구조는 두 인물의 시선의 교차에서 절묘하게 드러난다. 첫 만남에서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뒤를 쫓아갔다면, 이후 저택 안에서는 책을 빌리기 위해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쫓아가는 상황이 된다. 엘로이즈가 초상화의 모델을 거부했기에 마리안느는 흘끔거리면서 그녀를 훔쳐볼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은 당시 미술계에 통념적으로 일컬어지는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 엘로이즈가 그 그림을 혹평하고 모델을 하겠다고 말할 때 두 명은 그제서야 마주 보는 시선을 갖게 된다. 그림의 수정을 요구하고 스스로 포즈를 취하겠다고 선택했다는 점에서 엘로이즈는 모델인 동시에 제작자다. 바라봐지는 대상에 머물러 있던 뮤즈는 그런 식으로 화가와 대등한 입장을 가진다.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신화에서 주체의 대상을 바꾸는 해석을 했던 엘로이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다소 진부한 표현이지만 나는 이 영화의 장면들이 하나같이 예술적이라고 느꼈다. 어떤 장면이 그림 같다면 어떤 장면은 자수를 닮아있다. 영화를 손으로 빚는 것 같다는 말이 올바를지는 모르겠지만 셀린 시아마 감독은 스크린을 마치 캔버스나 자수의 도안처럼 사용한다. 백작 부인(발레리아 골리노)이 밀라노로 떠나 있는 동안 척박해 보였던 섬은 잠시 동안이지만 세 여성들의 낙원이 되는데, 부엌에서 수를 놓는 소피와 와인과 음식을 준비하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비추는 수평적인 카메라의 시선과 공간의 배치는 계급의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여기에는 비단 그림과 자수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예술이 등장한다. 신화를 다루는 책부터 마리안느가 연주하는 어설픈 비발디의 여름, 여인들의 작은 축제에서 나오는 노래까지도. 지금과 같은 오락거리가 없는 시대에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술이 그들에게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오락인 것이다. 이 예술들이 서로를 마주 보게 만들고 위로하며, 분리되어 있어야 할 공간들을 하나로 합쳐놓는다.

 

'사회는 나를 계속 감추려고 하지만 예술은 진실한 나를 드러나게 해준다.' [판타스틱 우먼]에서 마리나를 연기했던 실제 트랜스젠더 다니엘라 베가는 오스카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낙원의 문이 닫히고 달아난다는 선택도 할 수 없을 때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피의 낙태를 재연하는 그림과 엘로이즈에게 건네주는 마리안느 자신의 초상화, 그리고 엘로이즈의 초상화에 담긴 28폐지의 암시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낙원에 대한 기록이다. 그들은 서로의 마지막 모습을 예술에 새겨놓는다. 마리안느가 훗날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뒷모습을 향하고 비발디의 여름을 듣는 엘로이즈는 그녀의 시선을 깨닫지 못한다. 두 번 다시 그들의 시선이 마주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슬프지 않아.'라는 마리안느의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슬픔을 기록한 예술이 남아 있기에, 나는 너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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