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의 아이 후기-뉴노멀 시대의 새로운 기도
<날씨의 아이>는 희생제의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희생제의란 신 혹은 초자연적 존재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주요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의례를 의미한다. 인간 집단은 안위를 위협하는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게 되면 이를 극복하고 사회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처녀나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쳤다. <날씨의 아이>에서도 히나는 도쿄의 날씨를 맑게 하기 위한 인간제물로 등장한다. 희생제의는 원시사회의 산물로 머문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문화권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져 왔다. 흥미로운 점은 <날씨의 아이>에서 다들 아무 것도 모르고 모르는 척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의 맑은 날씨를 위해 히나가 희생되고 있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희생제의가 보다 은밀하게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 경쟁하고 갈등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들 간의 갈등은 공동체 내에서 무차별적이면서도 심각한 갈등 양상으로 치닫게 되고 극도의 사회적 긴장관계를 유발한다. 이때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은 사회 갈등을 희생양에게 전이시켜 사회 갈등을 해소하고 안정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 희생제의의 핵심이다. 개인의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에서는 더 이상 특정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드물지만 <날씨의 아이>에서 히나가 날씨를 바꾸면 몸이 투명해지는 것처럼 사회 갈등을 일시적으로 해소하고 안정을 되찾는 과정에서 누군가 그 대가를 치르는 일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소득 분배의 불평등 문제가 심화되자 정치권은 저소득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저소득층이 빚을 늘려 집을 보유할 수 있게 해주는 미봉책을 펼치는 한편 소득 분배가 불평등해지는 과정에서 보다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된 부유층과 금융권이 무분별한 차입 및 증권화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주택 가격 거품이 발생하였고 마침내는 금융 위기라는 값비싼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날씨의 아이>의 히나가 인간제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도쿄가 물에 잠긴 것처럼 공공부채와 민간부채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미래세대에 부채를 떠넘기는 것이 어려워진 현재 저성장, 저물가, 높은 실업률 등 그동안 비정상으로 여겨졌던 것이 정상이 되는 뉴노멀 시대가 도래하였다. <날씨의 아이>에서 세상은 원래 미쳐있고 도쿄가 200년 전에 바다였던 것처럼 고도 성장기에 정상으로 여겨졌던 것은 원래 비정상이고 비정상으로 여겨졌던 것이 정상인지도 모른다. 단지 <날씨의 아이>에서 날씨무녀들의 희생으로 도쿄의 사람들이 맑은 날씨를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미래세대에 부채를 떠넘김으로써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씨의 아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푸른 하늘을 바라듯이 뉴노멀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경제적 풍요를 바라고 있다. 최근 들어 다른 나라 사람들을 제물로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자 하는 국가 간 무역 갈등, 다른 계층, 다른 집단의 사람들을 제물로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자 하는 사회 계층 간, 사회 집단 간 갈등이 심화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날씨의 아이>에서 히나가 짧은 시간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날씨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의 희생을 제물로 하여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그저 미봉책에 불과하다.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빼앗을 수도 있다. 그 결과 <날씨의 아이>에서 도쿄가 점점 물에 잠겨 타키 할머니가 삶의 터전을 위협받은 것처럼 저성장, 저출산, 환경오염 등의 문제가 우리의 삶을 위협할 수도 있다. <날씨의 아이>에서 신카이 마코토는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일시적으로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안정을 되찾으려하기보다는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희생제의 시대에 기도가 희생양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보다 사회의 안정을 되찾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시대의 기도는 신이 있다면 우리에게 어떠한 것도 주지 마시고 가져가지도 말아달라는 호다카의 기도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쿠치카미사케를 한 잔 마시면서 생각해보면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에 비하여 별로일 수는 있다. <너의 이름은>이 도쿄와 이토모리, 3년이라는 시간차, 이승과 저승의 경계, 희미해져가는 기억, 황혼의 시간 등의 장치로 그리움의 감정을 증폭시켰던 것과 달리 <날씨의 아이>에서 이러한 장치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월호 사건을 겪은 사람들에게 운석충돌은 공감하기 쉬운 소재이지만 여전히 맑은 날씨와 경제적 풍요를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에게 도쿄가 물에 잠기는 것은 공감하기 쉬운 소재가 아니다. 하지만 도쿄가 잠기는 것이 저성장, 저출산, 환경오염 등의 문제가 공감하기 어려운 사회문제이기 때문에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날씨의 아이>는 소중한 영화, 잊고 싶지 않는 영화, 잊어버리면 안 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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