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모드
  • 목록
  • 아래로
  • 위로
  • 댓글 6
  • 쓰기
  • 검색

<세가지 색 연작(1993~1994)>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주는 역설

해리엔젤 해리엔젤
890 4 6

스포있어요

 

 

 

 

 

 

 

 

 

IMG_2584.jpg

폴란드의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프랑스에서 찍은 <세가지 색 연작(1993~1994)>은 많은 명작들이 그러하듯 제작 당시의 분위기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영화입니다. 당시 유럽은 눈앞으로 다가온 EU통합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직면해 미래에 대한 거대한 희망과 막연한 불안이 교차하던 때였죠. 당장 이 연작이 나오기 1년전인 1992년에 체결된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기존의 유럽공동체(EC)을 넘어 “유럽연합(EU)”이라는 명칭 아래 경제통합. 정치통합을 본격화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이 조약은 유럽 시민권, 단일통화 도입, 외교·안보·사법·이민 분야에서의 협력 확대를 규정하며 유럽 통합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했죠. 이런 식으로 하나의 정치 경제 문화로 묶이게 될 유럽에게 키에슬로프스키는 하나의 강령, 또는 도덕률을 영상화하여 제시하고자 합니다. 바로 프랑스 혁명의 피바람 속에서 태어났으나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된 세가지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죠.

 

감독은 이데올로기를 다루면서 흔히 빠지기 쉬운 프로파간다의 함정을 멜로라는 형식으로 빠져나갑니다. <세가지 색 연작>은 모두 고풍스럽고 서정적인 멜로물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당연히 주인공들도 멜로물에 적합한 당대 프랑스 최고의 여배우들이고요. 실제로 의식하지 않으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삼색 연작의 주인공들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각 주제의 화신들입니다. 잘 나가는 남편의 그늘 아래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다가 그의 죽음 이후 주체적인 삶을 선택하는 블루의 주인공(줄리엣 비노쉬), 사랑하는 아내(줄리 델피)가 야박하게 자신을 내치자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그녀와 평등한 지위를 찾고자하는 화이트의 주인공(즈비그니에프 자마호프스키), 무한한 애정으로 인간 불신에 빠진 괴팍한 노인(쟝 루이 트랭티냥)과 아름다운 우정을 이어가는 레드의 주인공(이렌느 야곱). 자칫 이념의 얄팍한 편린이나 스케치에 불과할 수도 있었던 캐릭터들에게 피와 살을 덧입혀 생명력을 불어넣은 건 역시나 줄리엣 비노쉬, 줄리 델피, 이렌느 야곱이라는 당시 최절정기를 구가하던 세 여배우의 열연 덕분이겠죠. 

 

그 밖에 제목이 내포하는 주제에 따라 변화하는 각 영화의 색조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OST들 모두 <세가지 색 연작>을 걸작의 반열에 올리기에 모자람이 없지만,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점은 바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윤리적 상상력입니다. 유럽은 이후 당시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정치는 극우화되었고, 경제는 나락에 쳐박혔죠. 이민자 문제에 대한 첨예한 대립으로 자유, 평등, 박애를 통한 인간과 인간의 유대는 사실상 허물어졌고, 브렉시트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통합의 실패는 점점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이건 무슨 영화판 펠레의 저주가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만, 그렇다고 이 영화들이 보여준 비전과 이상이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저 나이브하던 시대가 만들어낸 시대착오적인 유물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요? 

 

<세가지 색 연작>의 마지막 작품 <레드>의 말미에서는 도버해협을 왕복하던 유람선이 침몰해 극소수의 생존자만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죠. 현재의 유럽연합의 침몰을 예언이라도 하는 듯한 이 장면을 통해 감독은 유럽통합이 절대로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얼마나 많은 풍파를 겪게 될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가지 색 연작>의 주인공들을 유일한 생존자로 묘사함으로서 마지막 희망의 불씨만은 남겨놓습니다. 영화 내내 만난 적이 없거나 슬쩍 스쳐지나가던 그들이 공통으로 맞닥뜨린 시련 앞에서 겨우 한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죠.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과 이상을 제안하던 영화는 30년이 지난 지금, 실패하고 망가진 현실에서 당시에 가졌던 비전과 이상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가에 대한 힘겨운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영화가 보여준 윤리적 상상력과 오늘날의 파국적 현실 사이에서 발생한 메우기 힘든 간극이 도리어 이 작품들의 생명력을 연장시켰다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PS.

<세가지 색 연작>에서 제일 섬찟했던 장면인 줄리엣 비노쉬가 돌벽에 주먹을 긁으며 자해하는 장면은 원래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촬영하려했는데, 막상 착용해보니 너무 티가 나더랍니다. 그러자 한참 연기에 몰입중이던 비노쉬는 보호장구없이(!!!) 그 장면을 연기했다고 합니다.ㄷㄷㄷ

 

thumb-move_film_1664946610_600x338.jpg

신고공유스크랩

추천인 4

  • MJ
    MJ
  • 카란
    카란
  • 마이네임
    마이네임
  • golgo
    golgo

댓글 6

댓글 쓰기
추천+댓글을 달면 포인트가 더 올라갑니다
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profile image 1등
아이고.. 몸을 사리지 않은 열연이었네요
08:20
25.11.28.
profile image
golgo
이쯤되면 존경스럽죠. 요즘이면 CG 한 방으로 끝날 일이었겠지만.
09:04
25.11.28.
profile image 2등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는 점에 공감했네요
08:57
25.11.28.
profile image
마이네임
요즘 유럽발 기사들을 보고 있자면... 예전에 가지고 있던 유럽 판타지가 와장창 작살나는 수준을 넘어서서 한편으로는 이거 남 이야기가 아니구나 싶어요.
09:10
25.11.28.
profile image 3등
멜로 형식 안에 이념을 녹여낸 방식이 확실히 시대를 넘어가는 힘을 가진 작품이었어요~!
11:56
25.11.28.
profile image
카란

문제는 감독이 영화에서 제시한 고결한 비전이 현실에선 모조리 시궁창에 처박히는 형국이라는게... ㅠㅠ

14:05
25.11.28.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에디터 모드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공유

퍼머링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아바타: 불과 재] IMAX 3D 최초 시사회에 초대합니다. 150 익무노예 익무노예 5일 전17:41 7854
HOT [아바타]가 만든 유일한 성공 모델 31 다크맨 다크맨 5시간 전19:21 2400
HOT UDT: 우리 동네 특공대, 지금까지 소감. 3 MJ MJ 1시간 전23:58 387
HOT 2025년 12월 8일 국내 박스오피스 3 golgo golgo 1시간 전00:01 451
HOT 골든글로브 작품상 후보 12편 로튼토마토 지수 4 왕정문 왕정문 1시간 전23:34 545
HOT 오늘자 전리품 5 진지미 1시간 전23:26 280
HOT 골든글로브 2026 후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9개 부문 최다 ... 3 시작 시작 1시간 전23:19 598
HOT 2026 골든글로브상 후보작들 정리 8 golgo golgo 2시간 전22:36 1604
HOT (영상) 음악감독이 직접 지휘하는 '판타스틱4' 오케스... 5 나무야 나무야 3시간 전22:08 314
HOT 심은경&츠츠미 신이치가 말하는 <여행과 나날> 6 카란 카란 3시간 전21:58 401
HOT (약스포) 부고니아를 보고 3 스콜세지 스콜세지 3시간 전21:58 260
HOT 시네필 지망생의 good & bad 8 꿈영화 꿈영화 3시간 전21:35 737
HOT 좀 이따 발표되는 미국 골든글로브 후보 발표 중계입니다 (한국시... 5 스티븐킴 스티븐킴 3시간 전21:34 783
HOT [무대인사] 4K 60p 돌비비전 정보원 개봉주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 3 동네청년 동네청년 4시간 전20:21 315
HOT '영화계 산증인' 윤일봉, 오늘(8일) 별세…윤혜진 부친... 9 엔벨 6시간 전19:11 1127
HOT 영화 1987 (2017) 잊지 말아야 할 그날의 진실 | 낙타의 영화 리뷰 5 Nactaman 7시간 전17:54 436
HOT 생각보다 시간 빨리 흘러 가네요. 8 학대자 7시간 전17:37 887
HOT 일본 주말 박스오피스 TOP 10 (12/5~12/7) 8 카란 카란 7시간 전17:33 748
HOT 벌써 기세 좋은 아바타3 예매현황 12 말랑몰랑사탕 말랑몰랑사탕 8시간 전16:58 1766
HOT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1997)>을 보았습니다. 10 슈하님 슈하님 8시간 전16:55 1085
HOT 에단 호크, <죽은 시인의 사회> 촬영 당시 느꼈던 로빈 윌리엄스... 11 카란 카란 8시간 전16:55 1156
1198764
image
NeoSun NeoSun 34분 전00:44 135
1198763
normal
학대자 42분 전00:36 171
1198762
image
NeoSun NeoSun 50분 전00:28 195
1198761
image
NeoSun NeoSun 1시간 전00:17 199
1198760
image
golgo golgo 1시간 전00:01 451
1198759
image
MJ MJ 1시간 전23:58 387
1198758
image
스몽 1시간 전23:54 229
1198757
image
전단메니아 전단메니아 1시간 전23:46 192
1198756
image
왕정문 왕정문 1시간 전23:34 545
1198755
image
진지미 1시간 전23:26 280
1198754
normal
달과바람 달과바람 1시간 전23:20 484
1198753
image
시작 시작 1시간 전23:19 598
1198752
normal
엔벨 2시간 전23:14 174
1198751
image
예쁜봄 예쁜봄 2시간 전23:13 147
1198750
image
예쁜봄 예쁜봄 2시간 전23:13 173
1198749
image
왕정문 왕정문 2시간 전22:55 451
1198748
image
왕정문 왕정문 2시간 전22:45 459
1198747
image
golgo golgo 2시간 전22:36 1604
1198746
image
카란 카란 2시간 전22:27 272
1198745
normal
스티븐킴 스티븐킴 2시간 전22:24 721
1198744
image
NeoSun NeoSun 2시간 전22:21 396
1198743
image
나무야 나무야 3시간 전22:08 314
1198742
normal
파란이슬이 파란이슬이 3시간 전22:07 576
1198741
image
카란 카란 3시간 전21:58 401
1198740
image
스콜세지 스콜세지 3시간 전21:58 260
1198739
image
NeoSun NeoSun 3시간 전21:45 279
1198738
image
꿈영화 꿈영화 3시간 전21:35 737
1198737
normal
스티븐킴 스티븐킴 3시간 전21:34 783
1198736
image
NeoSun NeoSun 3시간 전21:28 317
1198735
image
학대자 3시간 전21:22 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