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스(2004)> 리뷰 - 좋았다. 철학적이어서, 주목받지 못한 존재의 이야기여서
김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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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노센스(2004)>와 <공각기동대(1995)>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이오니,
원치 않으시면 영화관람 후 다시 와주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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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들도, 희망도,
이미 '과학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는데,
사랑 역시 과학이 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공각기동대 극장판(1995)>의 후속작, <이노센스(2004)>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인용구이자 프랑스의 극작가,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라당'의 저 공상과학(SF) 소설 <미래의 이브(1886)>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제는 널리 쓰이고 있는 '안드로이드'(Android)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것으로도 유명한 이 소설에서는 현실에서 만난 여성에 실망하고 그녀와 똑같은 모습의, 보다 완벽에 가까운 인간형 로봇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원작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 문장이 로봇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게 된 상황에 대한 주인공의 자기 합리화, 혹은 그를 바라보는 창조주, 과학자의 자조 섞인 시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이노센스>는 99분이라는 다소 짧은 러닝타임 동안 앞으로, 또 앞으로 달려 나간다. 기술의 발전으로 이미 신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게 된 이들이 넘쳐나는 머언 미래, 로봇 관련 사건사고를 해결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 '공안 9과' 소속의 주인공 '바토'. 그가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도쿠스 솔루스' 사(社)의 안드로이드 제품군, '가이노이드'가 소유주를 죽이고 자폭하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새로운 파트너 '토구사'와 함께 수사에 나서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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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처럼 '<공각기동대>의 후속작'이라는 이유로 이 영화를 접할 분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하지만, <이노센스>는 굳이 그런 타이틀 없이도 독립적인 가치를 지니는 영화다. 특히 철학적이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종류의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전작을 능가하는 면모를 자랑한다. 99분의 러닝타임 동안 감독, 오시이 마모루로부터 철학교습을 받는 느낌이 들 정도랄까. 무엇보다 그 질문이 인간이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으며 갈고닦았을 종류의 것이기에, 그 가치는 영화에서 반복되고 연마되는 동안 점점 날카롭고, 또 예리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왜 인형, 로봇 등 본인과 닮은 존재를 만들려 애쓰는가?
그리고 그들 대비 인간이 우월하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이노센스>의 철학교습은 이와 같은 질문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대사 절반 가량을 심오하고 철학적인 문장들로 구성하는 형태로 이뤄지는데, 그 양이 요즘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얇은 명언집이나 필사책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과장이 아니다). 때문에 보는 내내 생각을 계속해야 한다는 압박이 거세긴 해도, 이런 부분이 <이노센스>를 살면서 계속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무거운 질문과 은은한 여운을 동시에 제공하는 '인생 작품'으로 만들어 준다.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실 것이다. 그런 작품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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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스>가 좋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영화가 <공각기동대>라는 이름 하면 떠오르는 아이콘인 여성 사이보그, '쿠사나기 모토코'가 아니라 그의 파트너이자 든든한 서포터였던 '바토'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였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옆에서 그를 묵묵히 보좌하며 어렵고, 때로 지저분한 일들을 감당해 온 조연의 이야기는 때로 주인공의 이야기만큼이나 빛나는 법이기에. 흥행을 생각하면 좋지 못한 선택이었겠지만, 오시이 마모루의 뚝심 덕분에 나올 수 있었던 결과물이 아니었나 싶다. 그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단지 바토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는 사실에만 열광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과제가 전작의 쿠사나기만큼이나, 때로 그 이상으로 무거운 만큼 그의 역할, 그리고 이 영화가 갖는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이 멋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바토가 전작에서 파트너였던 쿠사나기 소령을 잃게 된 후유증으로 한층 과묵하고 표정의 변화가 없는 무미건조한 인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노센스>를 관통하는 질문이 <공각기동대>의 그것에 비해 오히려 한층 피부에 와닿는 종류의 것이라는 점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작의 핵심 질문은 '영혼, 그리고 자아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기에 보다 심오한 내용이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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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도 영화 내내 쏟아진 철학적 문장들의 존재감 탓에 (이번에도) 본의 아니게 조연으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바토는 나름의 무거운 과제를 꾸준히 수행하며 묵묵히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러닝타임 내내 주인을 죽이고 자폭하는 가이노이드, 인체를 모두 로봇으로 대체해 인형이 되기를 선택한 자 등 '만들어진 존재'들을 상대하며 '태어난 존재'인 자신이 과연 이들 대비 우월하다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이를 통해 엔딩크레딧 이전에 자신만의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는 사명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것일 터.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영화관을 나선 이후 오히려 더욱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필자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것은 그 수많은 철학적 질문이나 멋들어진 세계관, 분위기를 휘어잡는 사운드트랙의 위용이 아닌, 자신의 클론 강아지 '가브리엘'에게 싸구려 건식 사료 대신 비싼 습식 사료를 사 먹이며 만들어진 존재에게 '진짜'라는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던 바토의 모습뿐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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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을 실컷 꼽아봤으니, 이제는 단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볼 차례다.
예상하셨을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 역시 너무 철학적이라는 데에 있다. 등장인물 간의 철학적 문답이 어림잡아 절반 가량은 되는데, 관객들이 한 문장을 곱씹어 소화하기도 전에 '다음 메뉴'가 연이어서 등장하기를 반복한다. 코스 요리를 시켰는데 질긴 육질의 스테이크만 연달아 등장하는 느낌이랄까(물론 맛이 없지는 않다만). 본인이 이런 심오함을 사랑하고 즐긴다면 크게 상관이야 없겠으나, 아마도 일반적인 SF 액션 영화를 기대했던 대다수의 관객들은 몰려오는 피로감에 꿈나라로 떠나길 택하진 않을까 싶다.
또한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 역시 관객 입장에서는 이 영화를 더욱 루즈하게 느끼게 만들 수 있을 법한 부분. 사건을 추적해 나가며 긴장감이 고조되는 정도가 그리 높지 않은 데다, 감정적 고양을 일으켜야 할 전투 장면 역시 다소 산발적이고 서로 분리돼 있는 느낌인지라 긴장감의 진폭을 다소 일정한 정도에 머물게끔 만든다. 심지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전투조차도. 여기에 전작인 <공각기동대>만큼이나 우울하고 축 처지는 분위기, 그리고 다소 설명이 부족한 이른바 '불친절한 전개'가 더해지기에 이 영화가 개봉 당시였던 2004년에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리며 흥행에서는 쓴맛을 봐야 했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넘겨짚어 본다.
그리고 다소 클리셰처럼 느껴지는 결말 역시 보는 사람에 따라 이 작품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물론 이 작품이 맞이하고자 하는 엔딩을 위해서는 반드시 등장해야 할 요소였지만, 연출적인 면에서 이 영화가 계속해서 끌고 온 철학적 흐름의 맥을 끊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기에 이를 더 좋게 그려낼 방법이 분명히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에서다.
바토와 그의 강아지, 가브리엘. 바토가 가브리엘에게 건식 사료 대신 습식 사료를 먹이려는 행위는 만들어진 존재인 가브리엘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내미는 위로의 손길인지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는 길은 고스트의 수만큼 많아.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후, 파트너인 토구사를 집에 데려다주며 바토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굳이 영혼(魂、たましい) 대신 고스트(Ghost, 작중 로봇 등을 포함해 만들어진 존재들이 갖고 있는 영혼 혹은 마음과 비슷한 개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가 일련의 여정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들'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끝마쳤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영혼이라는 단어는 '태어난 이들'에게만 붙일 수 있는 전유물이기에, 이를 사용하게 된다면 세상의 모든 만들어진 생명체들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게 되어버릴 테니까. 심지어 신체 개조를 거듭하며 이제는 자신의 육체의 흔적을 점점 잃고 있는 바토 자신의 존재마저도. 때문에 저 문장은 어쩌면 그들과 자신을 향한 일종의 위로는 아니었을지.
허나 관객 개개인의 생각에 따라 수많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만큼 '이 영화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영화다!'라는 말은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바토의 대사를 통해 오시이 마모루가 제시한 메시지는 명확하다. 생명을 갖고 태어났건, 만들어졌건 모든 존재에게는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는 것. 단, 스스로가 왜 지금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 왜 존재해야만 할 것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의 이야기이겠지만 말이다. 너무나도 강한 철학적 성향 등으로 개봉 당시에는 '괴작' 소리를 듣기도 했던 작품이지만, 본인이 SF 마니아라면, 그리고 평소 철학적 사유를 즐기는 편이라면 예상외로 좋은 경험을 제공할 영화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별점: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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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이노센스>를 수놓은 깊고 깊은 문장들 중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를 추려 독자 여러분과 나누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고 싶다. 그저 '철학적이어서 좋았다'라는 말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하기에, 그리고 이 영화가 단순히 스쳐 지나갈 작품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깝기에.
인간의 불완전성은 현실의 불완전성을 초래한다. 그리고 죽음의 완전성은 의식을 갖지 않거나 무한한 의식을 갖게 되겠지. 그리고 그런 건 인형이나 신만이 실행할 수 있는 것이고.
겉으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살아있는 게 맞는가 하는 의혹. 반대로 생명이 없는 사물이 살아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 인형이 불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형이 인간의 모습을 모방한 것이고, 인간 자신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야. 인간이 간단한 장치와 물질로 환원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 즉, 인간이라는 현상은 실은 허상이 아닌가 하는 공포.
아이들은 인간이라는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야. 확립된 자아를 가지고 자유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걸 인간이라고 한다면 말이지. 그럼 전 단계로서 카오스 속에 살아가는 아이들은 대체 뭘까? 명백히 내면은 인간과 다르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잖아.
여자아이가 소꿉놀이 때 쓰는 인형은 실제 아기의 대체물이 아니야. 여자애는 육아 연습을 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어. 즉, 육아는 인조인간을 만들려는 오랜 꿈을 가장 손쉽게 실현시켜 주는 방법이었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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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3등 '새의 피에는 슬퍼하지만 물고기의 피에는 슬퍼하지 않는다. 목소리 있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래서 OST도 샀습니당ㅎㅎㅎ)
영화 말미에 여자 아이를 질타하는 장면은 납득하기 좀 힘들긴 했네요. 오랫만에 다시 한번 보고 싶기도 하네요.




















게다가 소령 성우분이 돌아가신 탓에 더 귀하게 느껴지는 작품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