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감상/분석 | 냉정과 열정 사이 혁명 촌극
해달sMinis
※ 이 글은 블로그에도 함께 기록해두었습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감상/분석 | 냉정과 열정 사이 혁명 촌극)
※ 글의 짜임새 및 맞춤법 검토에 생성형 AI의 도움을 받았으나, 작품을 해부한 모든 논지와 해석은 온전히 저의 것임을 밝힙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냉정과 열정 사이 혁명 촌극"

1. 서두

혹시 1980~1990년대를 살아온 세대라면 아메리칸 드림이 어떤 이미지로 다가왔는지 묻고 싶다.
그 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베토벤>, <아이가 작아졌어요> 등 따뜻한 정서의 할리웃 가족영화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을 상상했다. 잔디밭 앞마당에 예쁜 복층형 집, 어여쁜 아내와 토끼같은 자식들이 있는 화목한 가정, 그리고 그 옆에 우리와 같은 이웃들. 미국에 살면 누구나 그런 풍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젠 911테러와 2008년의 경제위기로 인한 팍스 아메리카나 종말 이후, 할리웃 영화는 예전처럼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보다 <조커>, <허트 로커> 등과 같이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낸다. 그 중에서도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미국의 사회와 계급 구조를 날카롭게 해부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과 서늘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블랙 코미디 속에 녹여낸다.
2. 제목의 의미
제목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를 의역하자면 "산 넘어 산이다." 정도 될까? 끊임없는 투쟁은 우리가 살아가며 겪어야 할 시지프스의 숙명이지만, 이것은 개인 인생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거시 세계에도 적용되는 법칙이다.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를 일부 인용하면, 세계는 끊임없는 주류(보수)와 비주류(진보)의 싸움이 반복된다. 그 싸움은 기존 체계 안에서 계급 투쟁의 양상을 띠거나, 혹은 아예 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혁명으로 진행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 영화는 현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PC주의-문화전쟁, 그리고 이민자 문제를 들여다본다. 영화 속 인물들 각자가 치루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과연 무엇이며 이를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이상향은 무엇이고 그게 과연 허상은 아니었는지 물음을 던진다.
3. 록조: 반복된 개츠비의 비극

록조 대령은 묵시적으로 형성된 현대 미국의 사회계층을 이해할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중간 계층자로서 관점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주류일 수 있고, 혹은 비주류일 수 있다.
먼저 록조 대령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앞서 미국의 사회계층 구조를 도식화하여 전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일반론이 아닌 순전한 개인 견해이다.)
일반적으로 사회계층 구조는 피라미드 모델로 설명되곤 한다. 피라미드 구조는 권력의 수직성과 계층별 명확성을 직관적으로 나타낸다. 이해하긴 쉽지만 현대 미국과 같이 다원화되고 복잡하면서 계층간 구분이 불명확한 특성을 표현하기엔 한계가 있다.

미국 사회계층의 도식화는 동심원형 모델이 가장 적합하다. 원형구조는 중심에 가까울수록 권력이 집중된다. 즉, 주류는 인사이더, 비주류는 아웃사이더이다. 단,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경계는 불분명하기 때문에, 인사이더들은 배타성을 극대화하여 그들 자신을 구별하고 이권을 방어하려 한다.
이처럼 원형구조 모델은 고도화된 현대 사회 특성을 잘 반영하며 실제 미국의 물리적 지리 특성과도 맞물린다.(수도 워싱턴D.C.는 내륙 안쪽 / 불법이민자들은 국경지대에 맴도는 경향)
미국의 사회계층 구조가 동심원형이란 전제 아래, 다시 록조 대령 이야기를 해보자. 록조 대령의 사회적 신분은 원형 모델의 중심점과 가장자리 경계 사이 중간에 위치한 사람이다. 그는 이미 미국 사회의 주류로서 자리잡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심에 있는 초엘리트집단-이너서클로 나아가고자 하는 야망이 있다.
이민자들 입장에서 록조 대령은 인사이드에 있는 주류이자 나름대로 배타적인 사람이다. 그는 비주류인 이민자들과 유색인종들에게 매우 폭력적이다. 그런데 백인들로 이뤄진 초엘리트 집단 '크리스마스 클럽' 앞에선 전혀 입장이 달라진다. 원형 모델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 크리스마스 클럽은 인종적 순수성과 정치성향, 성적성향 등 극단의 배타성을 지닌 인사이더다. 이번엔 록조가 그들에게 아웃사이더이다. 이너 써클로 진보하려던 록조는 그들의 배타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제거된다.
그런데 스토리 구성상 클럽이 록조 대령을 제거하려는 서사는 완성도면에선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록조가 샷건을 맞고 리타이어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납득가능한 상황이었는데, 영화는 굳이 록조가 다시 살아나오는 장면을 보여주고 곧이어 나오는 시퀀스에서 다시 클럽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 록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쳐내도 전체 이야기 진행에 무방하다. 그렇다면 왜 2시간 4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가운데 굳이 사족같은 이야기를 넣은 것일까?
록조를 다시 살려내 죽게 만든 것은 영화의 메시지나 담론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록조는 자신을 죽이려 한 크리스마스 클럽을 복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첫번째 클럽 가입 인터뷰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두번째 인터뷰에선 자신의 치부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포장하며 자신의 갱생 의지를 확신시키려 한다. 이는 록조가 이너써클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또 클럽에 의한 록조의 죽음은 원형구조 모델에서 중심에 가까울 수록 배타성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록조 대령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클럽은 마치 자신들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단 하나의 요소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가차없이 제거한다. (아울러 클럽이 록조 대령을 처리한 방법은 밀폐된 공간에 가둬 가스로 죽인뒤 시체를 소각로에 태워버리는데, 이는 마치 나치의 제노사이드를 연상케 한다.)
동심원적 계층 구조 속에서 벌어진 록조 대령의 아이러니는 매혹적인 비극으로 와닿는다.
4. 퍼피디아는 진짜 혁명가였을까?

퍼피디아는 최변방 아웃사이더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억압받는 이민자들을 해방시키는 의적의 면모와 자신의 욕망이나 안위에 충실한 배신자의 면모를 모두 가진다.
퍼피디아와 그녀가 속한 '프렌치75'는 자신들이 혁명 운동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혁명이라는 것은 제3자인 시대와 역사의 판단이지, 만약 당사자가 자신의 행위를 혁명이라 말한다면 그건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녀의 행동을 고차원적 혁명 가치와 억지로 연관시킬 필요는 없다. 그것은 주류 사회에 대한 분노와 반항심에서 비롯된 객기에 불과하다.
우린 혁명이란 용어에 우상적 뉘앙스를 부여하여 그것을 위한 투쟁이 고귀하고 신성한 싸움인 것 마냥 착각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당장 프랑스 혁명을 생각해보라. 봉기를 일으킨 군중들이 처음부터 민주주의와 시민권리같은 숭고한 것을 외치며 절대왕정을 폐했겠는가? 당장 군중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현실의 생존, 가난, 자존심 등 저차원적 욕구 불만이었다. 혁명은 일단 다 파괴하고 보자는 파시스트적 급진성과 폭력성의 발로로 출발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파괴된 그 자리에 더 그럴 듯한 대체품을 가져다놓고 정당화까지 하고 나서야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퍼피디아의 행동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녀와 프렌치75는 아웃사이더인 흑인 여성으로서 인사이더 백인 남성을 폭력으로 굴복시킨다. 정조 관념도 그녀에게 남성 중심 주류 질서의 잔재일 뿐이다. 그녀는 애인 밥 퍼거슨이 있지만 적군 록조 대령과 자유로운 성생활을 영위한다. 가정이나 모성애 역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일 뿐이다. 기존 질서는 나 개인을 속박시킬 수 없다. 주류가 만들어놓은 모든 체계와 질서를 거부하고 파괴하고 조롱하는 것은 당장 객기에 가까운 몸부림일지 몰라도, 훗날 어쩌면 진짜 혁명으로 가는 진보로 평가될 수도 있다.
5. 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무능한 밥을 연기했을까?

밥 퍼거슨은 솔직히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그는 퍼피디아를 도와 혁명의 일원으로서 활약했지만, 어디까지나 보조 역할이었다. 그나마 돌봐야할 가족이 생기니 혁명은 뒷전이고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
나중에 그의 딸 윌라가 록조 대령으로부터 도망치고 납치되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동안, 밥 퍼거슨은 늘 한발 늦게 쫒아가기만 한다. 결국 윌라와 재회할 때까지 실질적인 활약은 미미하다.
그런데 영화는 밥 퍼거슨의 보잘것 없는 활약상을 이야기의 한축으로 다룬다. 이를 연기하는 배우는 무려 할리웃 최고의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다. 즉, 밥 퍼거슨의 이야기는 무시할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 영화는 도대체 왜 이 캐릭터를 주목하는 걸까?
밥 퍼거슨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늙은 보안관(토미 리 존스)을 떠올리게 한다. 토미 리 존스 또한 시끄러운 소동극 가운데서 늘 한발 늦게 등장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관조자로 나온다.
밥 퍼거슨도 관조자에 가까운 캐릭터인듯 하다. 영화 초반, 퍼피디아의 어머니는 그에게 말한다. 혁명에 재능도 없고, 신념도 없고, 그릇도 안되는 사람이니 퍼피디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 때 퍼거슨은 동의하지 않았을 지 모르겠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는가? 도피생활 중 그는 더이상 혁명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 듯 행동한다. 심지어 그는 중요한 비상시 대피 프로토콜도 망각한다.
어쩌면 밥 퍼거슨은 꿔다놓은 빗자루 마냥 잘못된 곳에 떨어진 존재이다. 그는 백인 남성이면서 아웃사이더인 흑인 페미니즘 운동세력과 어울린다. 어쩌다 퍼피디아의 꼬임에 넘어가 똑같이 객기를 저지르며 혁명을 부르짖지만, 그것은 그의 정신적 빈곤을 잠시 잊게 해주는 환각이다. 그 환각이 혁명에서 가족이라는 안식처로 대체되고 퍼피디아까지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혁명 따위 안중에 없는 한량으로 살아간다.
그는 윌라를 잃게 될 위험에 처하자 다시 혁명을 부르짖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가 딸을 찾기 위해 혁명 동지들의 도움이 절실했기에, 그 과정에서 다시 스스로 객기에 취한 것 뿐이다. 그는 이 퍼피디아나 차일드75가 말하는 혁명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서인지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저 자기의 안식처를 찾기 위함이다. 하지만 혁명의 궁극적 목적이 결국 나의 안식과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밥 퍼거슨도 나름의 투쟁을 치룬 것은 맞다.
영화 말미, 밥은 윌라와 재회하고 다시 마을에 정착하여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는 본래의 한량으로 돌아와 혁명 세력에 가담한 윌라를 마치 학교보내듯 잘 다녀오라며 태연하게 보내준다. 그 장면은 참 웃기면서도 혁명의 허상과 소시민적 관조, 그리고 가족애와 유대감이 느껴지는 희안한 장면이었다.
6. 혼혈아 윌라의 상징

밥 퍼거슨이 윌라의 출생 비밀을 알게됐는지 여부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뉘앙스이다. 내 생각엔 아마 밥 퍼거슨이 딸 윌라의 친부가 자기가 아님을 알았어도 변함없이 사랑했을 것이다.
윌라가 인종적 혼혈이면서, 주류 세력 록조 대령과 비주류 퍼피디아의 아이라는 점은 보수적 가치-순수성과 배타성을 파괴시키는 혁명적 존재임을 상징한다.
이 영화는 참 웃긴 것이 혁명 분자들의 허상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희망과 따뜻한 관점을 유지한다. 퍼피디아의 배신 행위나 유색인종-성소수자-이민자 등 오합지졸 비주류들끼리 서로를 믿지 못해 암구호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단합되지 않는 모습을 통해 혁명의 허상을 솔직하게 다루지만, 밥 퍼거슨과 윌라를 돕는 과정에서 그들이 결국 객기 하나로 강력하게 유대하고 연대하는 모습 보여준다.
반면 주류 세력을 바라보는 시선은 냉소와 동정으로 점철되는데, 이너써클의 배타성에 대해서는 냉소를, 완전한 악인은 아니었던 록조 대령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서는 아이러니함과 동정을 느끼게 만든다.
7. 결론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세상의 본질이 혁명의 결과보다는 투쟁의 과정 그 자체에 있다고 보는 듯하다. 우리는 어차피 각자가 망상하는 아름다운 유토피아를 위해 혹은 그냥 지금 세상이 마음에 안들어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지속할 것이고, 그로 인한 진짜 세상의 희노애락과 재미는 투쟁 그 자체에 있다고 말이다.
내가 혁명이라 말하는 투쟁이 다른 이에게는 객기로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록조 대령과 같이 결국 투쟁은 실패로 귀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와 상관없이 원 배틀로 끝나는게 아니라 어나더로 지속된다.
고로 그렇게해서 소파 위에 널부러진 밥 퍼거슨같은 관조자의 관점으로, 내가 서두에 한 말을 다시 번복해야겠다. 어쩌면 아메리칸 드림은 지금도 유효하지 않는가? 서로 갈망하는 이미지가 다를지언정 좁아터진 세상에서 여전히 치고박는 싸움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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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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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2등
3등
멋진 분석 리뷰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