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본능(1992) 리뷰
해리엔젤
스포있어요.
유럽 영화계에서 명망을 쌓은 뒤 미국으로 건너온 폴 버호벤은 <로보캅(1987)>과 <토탈 리콜(1990)>이라는 SF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연달아 성공시킴으로서 헐리우드에 안착합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그가 천착해왔던 주제인 섹스와 폭력에 대한 연구를 헐리우드식 스릴러로 구현해냅니다. 바로 <원초적 본능(1992)>이죠.
의외로 당시 <원초적 본능>을 본 비평가들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관객들은 샤론 스톤의 관능적인 몸짓 하나하나에 열광했고, 그야말로 전세계적인 흥행을 거둡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 <원초적 본능>은 당시 남자 아이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일종의 성인식 같은 영화였습니다. 얼굴의 연식을 속여가며 대범하게 개봉관으로 침투하거나, 열심히 형이나 누나 이름을 팔아 비디오로 빌려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빽판이라 불리는 불법복제 비디오를 구해서는 어두운 방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돌려보는 식이었죠.
이렇게 30년 전의 엄한 추억을 뒤로 하고 다시 본 <원초적 본능>은 에로라는 라벨을 떼고 보면 의외로 건실한 스릴러입니다. 폴 버호벤의 오랜 파트너였던 촬영감독 얀 드 봉이 잡아낸 90년대의 감각적인 정취와 제리 골드스미스의 몽환적이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음악, 히치콕에 대한 오마쥬가 물씬 풍기는 몇몇 장면까지, 세련된 만듬새가 주는 영화적 재미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충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훌륭한 것은 조 에스터하스의 다소 허술한 듯한 각본의 빈 틈을 메워주는 폴 버호벤의 뛰어난 연출입니다. 다른 영화 같으면 명백히 플롯구멍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이 빈 틈을 폴 버호벤은 관객의 추리력과 상상력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꿔 놓거든요.
일단 감독은 의도적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들 대부분을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만듭니다. 우리는 주인공 닉(마이클 더글라스)의 시점을 따라 범인으로 의심되는 캐서린(샤론 스톤 분)을 추적해 가지만, 사방팔방에 깔린 이 '신뢰할 수 없는 화자'들의 엇갈린 진술을 이리저리 짜맞추다가 도리어 혼란에 빠집니다. 심지어 닉조차 그리 신뢰할 만한 인간이 아니예요. 그는 유능한 경관이지만 동시에 술과 마약, 그리고 폭력에 중독된 인간이기 때문이죠.
또한 영화는 캐서린과 베스(진 트리플혼)의 동성애적 과거를 서브플롯으로 깔아놨습니다. 두 여인은 닉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상반된 진술을 합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베스가 모든 죄명을 뒤집어쓴 채로 죽고 진범일 것 같았던 캐서린이 법망을 빠져나가지만,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요? 팬덤에서는 얼음송곳 살인은 캐서린이, 총격 살인은 베스가 한 짓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지만, 캐서린의 말과 달리 '베스가 캐서린에게 집착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단 하나의 가정만으로도 사건의 진상은 모조리 뒤집어지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베스는 단 한 건의 살인도 저지르지 않은, 완전 무고한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원초적 본능>은 관객들의 적극적인 해석을 유도함으로서 몰입감을 확보하는 영리한 스릴러입니다.
마지막으로 샤론 스톤이 연기한 캐서린 트러멜이란 캐릭터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부모의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일찌기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은 그녀는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에 무려 대저택과 호화로운 해안별장을 소유한 금수저입니다. 대학에서 영문학과 심리학을 복수전공한 그녀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작가로도 잘 나갑니다. 이런 배경설정에 샤론 스톤의 저세상 미모와 관능미를 얹으면... 으아, 거의 완벽한 여신 강림이죠.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지독한 사이코패스이기도합니다. 아무 죄책감없이 살인과 섹스를 즐기며, 자기와 같은 살인자를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능력이 있어서 그들을 포섭한 후 차도살인에 이용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죠. 그녀는 작중 벌어지는 거의 모든 사건을 자신의 의도대로 능수능란하게 조종합니다. 영화의 분위기를 일찌감치 결정지어버린 그 유명한 '다리꼬기' 신을 보세요. 짬밥 먹을대로 먹은 수사의 프로페셔널들이 그녀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하나에 진땀을 뻘뻘 흘리며 죽어납니다. 본능적으로 그녀가 진범임을 알았던 노련한 형사 닉조차 꼼짝없이 그녀가 파놓은 관능과 욕망의 함정에 빠져 헤어나질 못합니다. 영화 엔딩에서 그는 살아남긴하지만 그건 순전히 그녀의 안배 혹은 변덕 때문입니다. 사실상 그에게 남은 운명이란 교미 후 배고픈 암컷 사마귀에게 머리를 쥐어뜯겨 죽을 수컷 사마귀의 그것과 별반 다를게 없죠.
정리하자면 뛰어난 지성과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지만 동시에 잔혹한 사이코패스 살인마라는 극단적인 양면성이 빚어낸 아찔한 팜므 파탈, 이것이 캐서린 트러멜입니다. 이에 필적할 만한 캐릭터는 그녀보다 1년 먼저 데뷔한 연쇄살인마계의 슈퍼스타 한니발 렉터 정도겠죠.
PS.
1. <원초적 본능>이 개봉 당시 비평가에게 저평가를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여성이자 양성애자를 사이코패스로 묘사한 것에 반발한 성소수자 인권단체와 페미니스트들의 집단적인 보이콧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우려와 달리 샤론 스톤이 연기한 캐서린 트러멜은 주체적이고 전복적인,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성 아이콘 중 하나로 기억된다는 게 아이러니죠.
2. 캐서린 트러멜 역으로 처음 러브콜이 간 배우는 샤론 스톤이 아니라 킴 베이싱어였습니다. 이후 무려 13명의 여배우에게 퇴짜를 맞게되는데, 그 중에는 전혀 배역과 안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의 데미 무어와 멕 라이언도 끼어있었다는군요.
추천인 9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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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액션에도 일가견이 있는 감독님인지라 작중 두 번의 차량 추격씬도 근사했죠.
3등 리뷰 잘 읽었습니다!
'기본적 본능'이라 했으면 느낌이 잘 안왔을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