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쿠와 세계 (2023) 전성기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 영화를 연상시키는 걸작. 스포일러 있음.
오키쿠와 세계는 오래간만에 보는 일본 60년대 전성기 걸작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다. 선이 굵고 본질을 향해 육박하는 묵직한 힘이 있다. 일상을 그리되, 그 인상을 사소하고 일상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주제도 아주 묵직 화려하다. 어떤 인간의 존재가 계급과 사회적 역할에 따라 결정지워져 버리는 봉건
사회에서,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무한히 뻗어가지 못한다. 사방 한평 정도되는 정신적 공간 속에서
갇혀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주 꽉 죄는 코르셋을 저마다 입고 산다. 그런데, 근대가 다가오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세계라고 하는 것이 무언지 아는가?"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모두들 이런 식이다. 자아가 사회적 구속 없이 무한히 확장된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충의"라는 개념 속에 갇혀 사는 사무라이의 딸 오키쿠도 그렇다. 결국은 사무라이라고 하는 사회적 지위에 속박되어 죽임을 당하고 마는 오키쿠의 아버지도 그렇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근대적 자아라고 하는 개념이 들이닥친다. 모두들 혼란스럽다.
스님과 오키쿠가 앉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오키쿠가 세계라고 쓰자, 스님이 세계에 대해 설명한다.
"저리로 갔다가 이리로 가는 것"이라고 스님이 설명하자, 오키쿠는 곁에서 고개를 몰래 갸우뚱한다. 사실 스님은 세계에 대해 잘 모른다. 그는 전통적 지식인이다. "세계는 저리로 갔다가 무언가에 의해 중단되지 않고 계속 갈 수 있는 것"인데. 스님은 "저리로 갔다가 무언가에 막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 어린아이들은 처음에는 스님의 말을 믿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자라서 세계에 대해 알게되고, 근대적 사회에 대해 싫어도 배울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 아이들이 스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스님은 자기 낡은 사상을 버리고 새로운 사상으로 나아가게 될까? 아니면, 시대 반동적인 인물이 되어 자기 낡은 사상을 골동품처럼 꽈악 끌어안고,
사회로부터 도태되게 될까?
이 이야기는 몰락한 사무라이의 딸 오키쿠가 근대적 혹은 현대적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사무라이라고 하는
봉건시대 긍지 높은 지위를 버리고,
똥 푸는 남자의 아내가 되어 함께 똥 푸며 다니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이것은 비극이 아니다.
영화 마지막에,
오키쿠는 남편과 함께 즐겁게 재잘거리며 찬란한 봄의 숲 속을 거닌다. 잎들이 바삭거리거나 바람에 흔들리며 작은 틈새를 주어 햇빛이 그 사이로 쏟아져내리게 만든다. 수많은 잎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며 들릴 듯 말 듯 소리를 내어 황홀한 한 순간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봄이다. 청춘이고 새로운 세계의 서막이다. 이 영화는 봄이고 청춘이라는 말을 여러번 한다. 그렇다. 그들은 똥을 푸러 함께 가는 길이다. 더럽고 사회적으로 천대 받는 길인가? 아니다.
이것이 새로운 길이다. 이제 막 시작하는 눈부신 세계의 서막이다.
똥 푸러 다니는 야스케는 말하자면 현자다. 자기가 하는 천대받는 일의 사회적 중요성을 잘 안다. 똥 푸는 더러운 일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거기에 성의를 다 한다. 자기를 천시하는 사람들의 모순과 우스꽝스러움도 다 안다.
그가 하는 말은 오늘날 그린 파이낸스니 ESG니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이백년 뒤의 세계와 통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회적 신분과 굴레에 의해 주눅들어 있다. 누가 때리면 그대로 맞으면서 비굴하게 웃는다. 사회적 신분이 있어서 에도에 들어가 살 수 있는 후배를 부러워 한다. 때리면 맞고 사회적 신분체계에는 허리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 야스케가 이 사회에 대항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보면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모든 피지배층이 이런 삶을 살았을 것이다. 세계라고 하는, 사회적 굴레를 초월하여 무한히 확장된 정신과 공간이 당시 없었던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에는, 야스케도 자기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사무라이 집안에 똥을 던지고 대항한다.
오키쿠는,
과거 일 때문에 사무라이들과 대결하다가 살해당하는 아버지를 보호하려다 목에 칼을 맞는다.
하지만, 봉건시대의 목소리를 잃은 대신 자유를 찾는다. 자기가 사랑하는 츄지를 찾아가 먼저 사랑을 고백한다.
신분적 차이 때문에 엄두를 못내는 츄지를 자기가 오히려 설득한다. 그리고, 사랑을 쟁취한다.
오키쿠의 열정 앞에서, 츄지도 자기 마음의 빗장을 열고 진심을 오키쿠 앞에 내놓는다.
현대적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소통하는 방식이다.
이 장면의 간절함과 강렬함 그리고 심오한 의미는,
이 감독이 이미 거장임을 한눈에 알게 한다. 굉장히 감동적이고 로맨틱하다.
이 감독은,
구로자와 아키라 정도까지는 몰라도,
일본 영화사에 한 획은 너끈히 그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장면에 코메디도 넣는다. 츄지에게 고백하러 온 오키쿠는,
주먹밥을 싸오다가 마차 때문에 땅에 주먹밥을 쏟는다. 츄지는 그 말을 (수화로) 듣고, 오키쿠의 손을 잡는다.
잔뜩 무게를 잡고 장면이 진행된다. 그런데, 츄지가 보니 오키쿠 입가에 밥알이 붙어 있다. 오키쿠는 그 주먹밥을
주워먹은 것이었다. 오키쿠는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지며 구석으로 가서 얼굴을 가리고
쭈그려 앉는다.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오키쿠의 사랑스러움을 200% 보여준다.
그 다음 위의 감동적인 장면이 이어진다. 이 연출과 연기는 비르투오소의 솜씨다.)
굉장히 섬세하면서도, 전성시 구로자와 아키라를 연상시키는 박진감과 장엄함이 있다.
본질에 육박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사상을 그대로 영상으로 번역한 앙상한 것"에 빠지지 않는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앙칼맞고 빈 틈 많으면서도 착하고 사랑스러운 오키쿠의 매력과
건실하고 착실한 츄지, 현자이면서도 사회적 굴레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야스케, 세계라고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오는 것을 알면서도 과거 신분사회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택한 오키쿠의 아버지 등
다채롭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나와서
때로는 로맨스를 때로는 코메디를 펼친다. 그 유연하고 자유자재한 드라마로부터
주제는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이런 영화 쉽게 보기 어렵다.
추천인 7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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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쿠로키 하루는 역시 연기파 배우에요~~저도 괜찮게 봤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