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년의 기다림> 후기입니다.!!!(약스포 주의)
원문 : https://alook.so/posts/1RtR7m1
극장가 비수기라 볼 영화가 많이 없었다. 구독하는 영화 유튜버가 3000년의 기다림을 추천하길래 극장에 보러 갔다. 매드맥스를 감독한 조지 밀러 감독 영화이고 틸다 스윈튼이 나오니까 평타는 치겠다 싶어 기대를 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조금 실망했다. 매드맥스를 찍은 감독의 영화 맞나 싶더라. 시원하지도 않고 속도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 영화가 매드맥스와 다른 장르라서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기대를 한 게 문제긴 했다. 작은 실망감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곱씹어 보니 실망은 사라지고 생각할 부분이 많은 좋은 영화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해당 영화에 관한 감독의 인터뷰나 후기, 전문가 평가는 1도 보지 않았다. 온전한 나의 감상을 남기고 공유하기 위한 따끈한 후기 가보자고!
(*일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영화 초반부에 졸면서 봐서 내용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 속도감이 느렸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대사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졸았다. 반성한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초반부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틸다 스윈튼과 이드리스 엘바의 캐릭터를 소개하는 스토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긴 하다.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알리테아는 강의하는 능력있는 학자이다. 상상력도 풍부하다. 하지만, 그 상상력을 억제하려고도 한다. 그녀는 가족이 없다. 남편이 있었지만 다른 여자에게 가버려서 혼자된 캐릭터다. 그렇게 혼자 여행 간 터키에서 우연히 구입한 병으로부터 지니를 소환하게 된다. 그리고 정령 지니가 겪었던 판타지와도 같은 일들을 경청하며 질문을 이어나간다.
이드리스 엘바가 연기한 불사신 정령 지니는 알라딘 지니와 마찬가지로 3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능력을 가졌다. 소원과 관련한 사건들로 인해 3000년을 병에 갇히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며 알리테아를 만나게 된다. 그 긴 시간 동안 희로애락과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알리테아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한다.
나는 지니가 겪은 3000년 동안의 이야기보다 소원에 집중했다. 지니는 남의 소원을 들어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위한 소원은 스스로 들어주지 못한다. 병 속에 갇혀버리면 스스로 나오지 못하고 누군가의 물리적 행위를 통해 나올수 있다. 또한, 병에서 나온다 한들 지니는 병뚜껑을 열어준 사람의 소원 3가지를 들어줘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다. 한계치가 있는 캐릭터다. 불사신이지만 스스로를 정령으로 칭하는 이유가 아닐까.
일반적으로 소원이란 자신을 위해 바란다. 사람의 우선순위 1위는 자기 자신이니까. 만화나 영화에서 봐왔듯,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거나 자신의 목표를 위해 소원을 빈다. 생일날 소원을 빌 때도 대부분 스스로를 위한 소원을 빌지 않을까.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한 소원을 비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소원은 개인적 성취를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며 상대방을 위한 이타적 수단이 되기도 한다. 소원을 비는 주체에 달려있다.
극중 몇 번의 사건들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소원까지는 큰 문제 없이 진행된다. 하지만, 항상 결정적인 순간들에서 지니가 병에 갇히거나 지니가 상대방의 소원을 중단시키는 상황이 발생해 3000년 가까이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한다. 상대방에 따라 지니의 능력인 소원은 지니 스스로에게 자유를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고 속박이 되기도 한다. 상대방이 어떤 소원을 빌지도 모르는데 상대방을 온전히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알리테아는 지니와 달리 특별한 능력은 없다. 자유를 원하는 모양새도 아니다. 남편과의 이별 이후 모든 것들에 심드렁한 모습이다. 고독해 보이기도 한다. 다리를 떠는 모습으로 보아 불안한 것 같기도 하다. 원하는 것이 없다고도 한다. 이런 그녀가 지니와 이야기할 때는 기가 막히게 경청한다. 판타지에 가까운 3000년 동안의 이야기를 큰 의심 없이 말이다. 이는 그녀의 능력이자 장점이다.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들어주는 것.
이야기도 소원과 비슷한 특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 자기 자랑이나 자신 주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의 이야기는 개인을 나타내기 위한 개인적인 수단일 뿐이다. 반면,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공감을 넘어 연대까지 이어지게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정령 지니와 알리테아 각각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외롭기도 하다. 이들은 서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각자의 능력을 서로를 위해 사용하고 사용당하는데 거리낌 없다. 알리테아는 지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니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소원을 빈다. 지니는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알리테아의 소원을 들어주며 곁에 있는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들의 사랑을 위해 또는 알리테아에 대한 사랑을 위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다.
세상 많은 이야기를 잘 아는 알리테아가 강연을 위한 이야기가 아닌 상대방을 위한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에서. 지니 자신의 자유를 위한 상대방의 소원이 아닌 상대방을 위한 소원을 진정으로 들어주는 모습. 이는 주인공들의 내적 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야기를 위한 영화이기도 하고, 사랑을 그린 영화이기도 하다.
짧은 상영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성장과 사랑을 풀어내기 위해 여러 이야기로 구성된 영화다. 이를 풀어내기 위해 정령 지니를 끌고 오는 상상력은 충분히 손뼉 칠만하다. 복잡한 영화를 즐기지 않는다면 추천하기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 가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앞의 장면들이 오버랩되며 영화를 곱씹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꽤나 한정된 공간에서 알리테아와 지니의 대화로 영화가 진행된다. 이런 연출 자체가 감독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언제, 어디서 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상대와 나누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바빌론이 영화에 대한 사랑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사랑 영화다.
지니는 알리테아와 같이 걸으며 혼자 이런 말을 되뇌었을지도 모르겠다.
“3000년 동안 기다려 왔던 건 자유가 아니라 사랑이었구나”
매드맥스 감독이 차분한 이야기도 맛깔나게 잘 푸는구나 라고 생각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