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숨결' 시사회 후기- 그저 찬란하기만 한, 관조를 통한 잠깐동안의 피정
특정 종교에 국한된 단어는 아닙니다만,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에 머무르며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가톨릭 교회에서는 피정(避靜)이라고 합니다. 특별한 절차나 양식이 정해진 것은 아니고 세속의 소음을 차단한 채 내면을 돌아보는 행위라면 기도 명상 때로는 침묵도 모두 피정의 범주에 들어가죠. 의미만으로 보자면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일상 밖의 장소 어디에서든 가능하나 보통은 피정을 위해 마련된 시설이나 수도원 등에서 행해지며, 개인적으로도 가능하고 단체/공동체 단위로도 가능합니다.
40여년간 나이롱 신자로 살아온 저 역시 몇차례 피정을 경험했는데, 속세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진정한 의미의 휴식으로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만 또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여럿이 함께 들어간 피정에서 고작 몇시간 정도 대침묵(피정 프로그램의 형태와는 상관없이 일체의 대화를 금하는 시간입니다)을 거치는 것 만으로도 꽤나 힘이 들어요. 성찰과 침묵에도 어느정도 훈련은 필요한 법이거든요. 당장 한시간 정도 되는 미사시간조차 집중하는 게 어렵고 심지어는 15분 남짓 걸리는 묵주기도 한번을 할 때도 오만 분심이 다 드는데 말이죠. 농담처럼 지인들과 '수도자들은 매일이 이런 삶일텐데 대체 어떻게들 사는지 참 궁금하다'고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기도의 숨결>은 프로방스의 성 베네딕도회 수녀들의 일상을 관조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영화는 베네딕다라는 수녀의 서원식으로 시작합니다. 수도서원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첫 서원인지 종신서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분위기로 봐서는 종신서원인 것 같고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봐선 시골 동네의 조촐한 잔치같은 인상도 풍깁니다.
정말이지 저렇게나 기쁠까 싶을 만큼 환한 웃음을 만면에 띄운 베네딕다 수녀의 모습을 시작으로 검정 베일을 쓰고 엎드려 부르심에 응하는 등의 서원식 장면이 느릿느릿 흘러간 뒤, 고정된 카메라 정중앙에 자리잡은 수녀원 문이 열리고 서원식에 참석했던 동네 사람들이며 서원식을 집전했을 주교님 등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는 동안 베네딕다 수녀가 아마도 조카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뺨에 키스를 하고 머리를 쓰다듬는 등 인사를 마치곤 안으로 들어갑니다. 밝은 얼굴로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수녀원 문이 닫기고 소박한 메인 타이틀이 뜨고 나면, 영화에서 '외부인'은 더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봉쇄 수도원은 아닌 듯 하니 어떤 형태로든 외부와 관계를 맺고는 있을 것 같습니다만, 담담하게 수도자들의 하루하루를 비추는 동안 외부 또는 외부인은 철저하게 배제된 채로 진행됩니다.
그것은 비단 사람에 국한된 것 만은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 함께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고(식사시간 내내 어느 수녀가 무언가를 낭독하는데, 내용을 들어 보니 일종의 뉴스를 전달하는 것 같았습니다. TV나 라디오가 아닌 수녀의 목소리로 세상 물정을 전하는 거겠죠), 캔버스에 성화를 그리거나 이콘에 금박을 박거나 나무를 잘라 십자가를 만들고 가죽 끈을 꿰고 트랙터를 몰아 밭을 가꾸고 뿌리작물을 심는 '일상'이 일말의 꾸밈이 없이 그저 담담하게 흘러가는 동안, 마땅한 나레이션이나 BGM조차 없습니다. 종종 흘러나오는 수녀들의 기도소리는 그 자체로 음악이 되고, 악기 역시 성가 반주에 사용되는 오르간과 보이지 않는 어떤 현악기(하프 비슷한 음색을 냅니다)를 제외하면 피아노조차 기도의 첫 음을 잡는 정도의 용도로만 사용이 됩니다. 가톨릭 기도문 특유의 가락이 담겨있는 기도를 다함께 바칠 때는 여성 특유의 음색이 다소 높게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가 실로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묵상하고, 노동의 결실을 먹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수녀들의 일과 동안 너른 풀밭에 의자로 라인을 긋고 공을 던지며 깔깔거리는 피구 장면이 고작해야 이 영화에서 제일 떠들썩한 장면입니다.
영화는 수도생활의 면면을 조용히 응시하면서 어떤 해석도,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여기가 어느 나라의 어느 수도회라는 설명조차 해주지 않고요. '체험'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겠지만, <기도의 숨결>의 120여분 러닝타임은 수도생활 그 자체를 느끼는 시간으로 기능합니다. 일견 세속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신에게 귀의하는 삶이 어떤 가치나 의미가 있을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고 기꺼운 마음으로 수도생활을 선택한 분들의 기쁨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순간 꾸밈없는 민낯과 청빈에 근거한 수녀들의 얼굴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기 시작할 때쯤이면 그다지 멋스럽지 않은 화면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시종일관 덤덤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몇번인가 해가 지고 해가 뜨고를 반복하다 마지막엔 해뜰 무렵의 수도원 전경을 잠깐 비춰주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고작 두시간 남짓이었을 따름인데, 여느 영화관람 때와는 기분이 사뭇 다릅니다. 밖으로 나와 조용한 여운을 곱씹으며 잠시 길을 걷고 늦은 저녁을 챙겨먹는 동안 다시금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니 새삼 내가 굉장히 시끄러운 세상에 속해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들 수록 내가 살아온 인생이 어떤 의미였을까에 대해 다소 침울하게 돌이켜보곤 하는 시기에, <기도의 숨결>은 모처럼 잠깐이나마 피정에 들어간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 EST였어요.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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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가톨릭에 국한된 건 아닐 거예요. 불교에도 묵언수행이 있죠 아마. 때론 침묵이 더 많은 표현을 가능하게 해 주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단정지을 순 없는데, 가톨릭은 통성보다는 침묵 쪽을 더 선호하는 것 같아요.
전 이상하게 가톨릭 신자인데도 두 작품 모두 관람을 못했네요. 가만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렇게 조용한 영화들이야말로 극장에서 보는 편이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천주교 신자분들께 추천할만한 작품이군요.
후기 잘 봤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차마 쑥스러워서 적진 못했는데 개인적인 경험과도 좀 맞닿은 부분이 있어서 세간의 평처럼 '힐링'을 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모처럼 아주 조용한 곳에서 잠깐 피정을 하고 나온 기분이 꽤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