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무 시사) 블랙폰 감상문(영화 내용 있음)
피는 물보다 진하고, 남매는 용감했다.
소년들의 우정을 얕보지 마라. 너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
1. 누구나 한번쯤은 겪는 성장통
아버지와 여동생과 함께 사는 피니는 평범한 십대입니다.
야구팀에서 투수로 활동하고(그러다 브루스에게 홈런을 내주죠) 학교에서는 일진들에게 괴롭힘도 당하고요.
그럴 때 피니를 지켜 주는 게 친구인 로빈과 여동생 그웬입니다.
그웬은 야무지고 똘똘한 아이인데 무척 용감하기도 해요. 오빠를 괴롭히는 녀석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습니다.
시대 배경이 1978년인데 영화 도입부에 군인 연금 이야기가 슬쩍 지나가는 것으로 보아
피니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것 같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로 술을 많이 마시고 아이들에게 종종 손찌검도 하는 것 같아요.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나오는데 환청이나 환각을 보고 예지몽도 꾸었던 모양입니다.
그 피를 그웬이 이어 받았고 나중에 사건 해결에도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평범하면서도 십대가 겪을 법한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는 피니를 보면
그 시기는 크건 작건, 빠르건 느리건 성장을 위해 누구나 한번쯤 어떤 형태로든 아픔을 겪는구나 싶습니다.
물론 그래버라는 납치 연쇄 살인범을 만나는 엄청난 변수는 빼고요.
2. 평범한 일상의 고마움을 깨닫게 해 주는 영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우리는 매일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피니와 그웬도 마찬가지고 앞서 납치되었던 다른 소년들도 그랬겠지요.
브루스의 어린 시절 영상이 나오는데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무탈히 살던 한 소년이
하루아침에 납치범의 손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게 서글프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습니다.
피니도 마찬가지죠. 흐트러진 물건을 주워주겠다는 호의를 내비친 죄(?)로 납치 대상이 되다니요.
영화 마지막에 피니와 그웬이 서로 얼싸 안을 때 ‘아, 저 아이들은 이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싶어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물론 이 사건으로 입은 마음의 상처도 있겠지만 피니와 그웬이라면 잘 이겨내리라 믿게 되죠.
3. 장르는 공포, 하지만 드라마로 장식하는 대미
공포 영화라 그래서 긴장하고 봤는데 의외로 웬만한 드라마 못지않게 감동적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장르에 ‘드라마’를 추가해 줘야 할 듯합니다. 그래버나 이미 죽은 소년들의 등장에서는 놀라기도 했고 공포가 맞았지만 오빠의 안전한 귀환을 바라는 그웬의 기도나 중간 중간 보이는 학교와 집에서의 장면에는
드라마 영화의 요소가 많았고 무엇보다 다 보고 나면
먼저 납치된 소년들이 보여주는 의리에 가슴이 너무나 따뜻해졌습니다.
피니를 살리기 위한 그웬과 유령 소년들의 노력이 감동적입니다.
이런 서사의 흐름이 기존의 공포와는 확연히 다른 <블랙폰>만의 매력을 만들어 내는데
공포는 무섭고 소름 돋고 끔찍하다는 류의 편견을 싸악 없애주었습니다.
몇몇 흠칫흠칫 하는 장면만 잘 견뎌 낸다면 공포에 취약한 관객들에게도
분명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영화이지 싶어요.
4. 원작의 기발한 상상력
저는 처음에 연결도 안 된 구식 전화기가 울린다는 설정이 어딘가 스티븐 킹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원작과 각색에 대한 자막이 나왔기 때문에 아닌 걸 알고 보기는 했지만
이 판타지와 공포의 중간 어디서 멋지게 줄타기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보자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이런 건 전혀 다른데 <피가 흐르는 곳에>(황금가지, 2021)라는 단편집에 ‘해리건 씨의 전화기’라는 작품도 전화라는 걸 매개로 사후 세계의 인물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무언가 <블랙폰>을 연상시키는 게 있습니다.
원작을 쓴 조 힐이라는 작가님은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이 자자하시더군요.
<블랙폰>의 원작인 동명의 단편 소설이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출간이 되었었습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절판된 <20세기 고스트>(비채, 2009)라는 단편집 안에
‘검은 전화’라는 무척 정직한 제목으로 실려 있습니다. 원작과 영화의 이야기는 어떻게 같고 다를지 궁금합니다.
5. 아역 배우들의 열연, 에단 호크의 변신
이 영화의 주연과 조연이 모두 아역 배우들인데 다들 연기가 훌륭합니다.
피니 역의 배우도 그웬 역의 배우도 다들 안정적인 연기를 펼쳐 주어서 영화에 집중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는 에단 호크 배우님은 주로 말랑하고 부드러운 역할을 한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이번에 정반대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중저음의 악당 목소리도 괜찮은데요.
6. 이런 공포라면 얼마든지 도전!
기존에 알고 있던 혹은 생각하던 공포와는 꽤나 달라서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감동도 했습니다.
주변에 공포를 꺼리는 지인들에게도 몇몇 장면에서만 좀 놀라고 끝까지 보다 보면
형제애와 우정, 의리에 감동할 거라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겠어요.
항상 새롭고 좋은 영화로 기분 좋은 설렘을 주는 익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