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았던 누군가의 <살인의 추억>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3 때니까 기생충이 개봉할 즈음이었던 것 같네요. 부모님의 권유로 살인의 추억을 처음 봤었습니다. 그 전까진 송강호의 유명한 대사인 "밥은 먹고 다니냐?"만 알고 있었는데, 상당히 재미있더라고요. 영화에 관심이 없을 때여서 미장센이나 촬영기법엔 관심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꽤 재미있게 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다시 봤습니다. 엄청난 걸작이더군요. 그 전까지 몰랐던 건 아니지만요. 유튜브 댓글이나 이런 데에서 살인의 추억이 걸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 걸작 맞지. 잘 만들었지" 이런 반응이었다면, 이제는 "크.....살인의추억 걸작이지..... "진심이 담긴 반응을 쏟아낼 것 같습니다.
1986년 10월 23일, 화성의 한 농수로 밑에서 무참히 강간당한 여성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이때 등장하는 형사 박두만송강호은 과학적인 증거보다 직감을 선호하는, 아주 구시대적인 형사입니다. 그리고 12월, 또 다른 피해자가 발견됩니다. (그 유명한 향숙이) 몇 달이 지나고,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자원한 서울 형사 서태윤김상경이 등장하며 과학적인 근거와 방식으로 사건을 수사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박두만과 사사건건 부딪히게 됩니다.
살인의 추억에는 인상깊은 구도나 장면이 여럿 등장합니다. 두 번째 피해자가 나왔을 때의 롱테이크가 굉장히 유명한데, 봉준호의 연출력과 송강호의 연기를 확인할 수 있는 명장면임과 동시에 그 시대의 열악한 현장보존의 현실을 냉소적으로 보여주는 명장면입니다.
https://youtu.be/o_YmI8lA7zk
4번째 피해자가 범인에게 습격당하는 장면은 처음 봤을 때부터 절대 잊을 수 없던 장면입니다. 이문세의 명곡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부르며 빗속을 걸어가던 피해자는 자신의 노래를 따라부르는 휘파람 소리를 듣게 되고, 전속력으로 도망가지만 앞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범인에 꼼짝없이 잡힙니다. 보신 분들 다 놀라셨지 않을까 싶네요.
(혐주의)
4번째 피해자가 발견된 곳에서 여성속옷을 입고 자위하는 남자를 보게 된 박두만과 서태윤과 조용구김뢰하는 남자와 추격전을 벌이게 됩니다. 자위하는 장면도 충격적이고, 추격 장면을 찍은 구도라던가 연출 기법이라던가 여러모로 천재적인 장면입니다.
가장 중요한 밥은 먹고 다니냐? 장면입니다. 유력 용의자로 채택된 박현규박해일의 행적을 뒤쫓던 서태윤이 그를 놓치고, 그 사이 범인은 서태윤과 안면이 있던 학생을 살해하게 됩니다.
범인은 박두만의 애인과 학생을 두고 갈등하는데, 그 갈등 상황을 카메라로 표현한 것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학생이 누군지 알아본 서태윤은 분노에 휩싸여 박현규의 집으로 향하고, 박현규를 끌고 나와 폭행하게 됩니다. 박두만은 사건의 증거에서 나온 정액과 박현규의 dna를 비교한 결과를 들고 와 서태윤을 말리고, 서태윤은 서류를 읽지만 박현규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뿐입니다. 서태윤이 초반부부터 그렇게 믿던 서류서류는 절대 거짓말 안합니다에게 배신당하는 장면입니다. 박두만 또한 서류를 보지만 영어를 하지 못해서 평소에 하던 육감수사를 하게 되지만눈을 똑바로 봐! 결국 그가 살인범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되자 체념한 듯 중얼거립니다.
X발 모르겠다. 밥은 먹고 다니냐? 가라.. 박현규는 수갑을 찬 채로 도망가고, 이성을 잃은 서태윤은 박현규가 간 방향을 향해 총을 난사할 뿐입니다. 저 대사는 의미를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그렇게 나쁜 짓을 해놓고 밥이 넘어가냐?"일 수도 있고, 억울하게 용의자로 몰린 박현규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내비친 걸수도 있죠. 어떻게 해석하던, 영화 역사에 남을 명대사임은 확실합니다.
이것들 말고도 좋은 장면들이 많습니다. 논두렁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장면들도 있고, 술집에서의 난투극, 송강호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 엔딩까지. 엄청난 영화이죠. 한국의 블랙코미디 중엔 살인의 추억이 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도요. 봉준호의 괴물같은 연출력이 돋보이는 괴물같은 영화, <살인의 추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