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변화하고 진화하는 거장의 멜로 (스포X)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제가 기억하는 그의 영화에는 대부분 격렬한 에너지가 함께했습니다. 복수 3부작은 물론이고 미학의 끝에 달한 듯한 미장센과 격렬히 요동치는 감정선으로 질주하는 비교적 최근작 '아가씨' 도 마찬가지였죠. 그러나 '헤어질 결심' 은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눈에 띄게 정적이고 관망적인 영화였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스타일리시함이 덜한 영화라는 뜻은 전혀 아니지만요. 벽지만 봐도 아시잖아요.
모든 씬의 구도, 색감, 촬영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짜여진 부분이 없었고 특유의 미술이 더해지니 이렇게 이질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세계를 구축하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관능적이면서도 선정적이지 않고 품위 있는 이미지로 그가 멜로를 잡으면 이렇게도 될 수 있구나, 라는 새로운 생각도 들었죠.
시청각적으로 눈길을 끌며 쓰나미처럼 훅 잠식하는 화려함보다 우아하고 작은 디테일로 모래사장에 천천히 스며드는 파도같은 이번 영화는 기존에 형성되어 있던 '박찬욱' 이라는 틀에서 가장 바깥쪽에 자리하면서도 그 이름을 빼놓고는 절대 얘기할 수 없는 작품으로 느껴졌습니다.
정말 그 박찬욱이 맞나, 싶다가도 눈 앞을 가리는 안개를 걸어가듯 어떻게 흘러갈 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줄곧 따라가다 엔딩 장면에서는 어느새 박찬욱이라는 바다에 다리가 푹 잠기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상당수의 기교를 덜어내고 대부분의 이야기를 오롯이 배우들의 힘으로 끌고 가면서도 특유의 교차편집과 매끄러운 윤색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연출적 관록이 지금껏 보아온 멜로물 중 가장 감탄하며 감상하게끔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투박하지만 강렬한 맛이 강했던 초기작에서 특유의 리듬을 구축하고 이제는 힘을 뺀 것 같으면서도 세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아름다움에 거장의 진화과정을 보는 것 같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 멜로만큼 배우의 색채나 존재감이 영화의 완성도를 크게 좌우하는 장르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박해일과 탕웨이 두 배우 모두 지금껏 연기해온 인물들 중 이번 작품에서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예요.
탕웨이 배우의 강렬함이야 두 말할 것도 없지만 박해일 배우가 이렇게까지 강렬한 배우라는 걸 이번에 처음 느끼게 된 것 같아 새삼 기뻤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다양한 배우들이 나와 이야기의 맛을 돋궈주기도 하여서 나름 풍성한 맛도 있었네요.
영화가 연상케 하는 히치콕스러운 면이나 여러 리뷰들에서 고전들을 언급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 쪽에 무지하기에 잘 모르지만 다시 보기 전에 리뷰에서 언급된 영화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싶어지네요. 어쩌면 영화 평론가, 비디오가게 사장으로서의 모습도 가지고 있는 씨네필로서의 모습이 이번 영화를 만들며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표출된 모습은 아닐까 싶습니다.
'헤어질 결심' 은 여러모로 '올드보이' 와는 반대 방향에서 박찬욱 감독님의 가장 큰 족적 중 하나로 남지 않을까 싶은 영화였습니다.
이런 스타일마저도 능숙하게 소화하시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감독님의 최고작은 차기작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네요.
남들보다 빨리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에다 감독님 본인께서 참석하신 GV까지 참 알찬 시간이었습니다.
처음 극장에서 보게 되는 감독님의 영화였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다만 개봉일까지 기다려야 하는 게 참 힘드네요, 하루빨리 개봉해서 N차도 하고 스포일러 걱정 없이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돌아오는 길에 '정훈희 - 안개' 를 계속 들었는데 들을 수록 과연 영화에서 이 노래를 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싶은 밀접한 곡이었네요.
※ 밤늦게 작성한 글이 맘에 안 들어 오늘 아침 고치려다 날려먹는 바람에(...) 수정재업합니다. 혹시 기시감을 느끼셨다면 그게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