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매스> 리뷰, [공간], [이해와 용서], [모른다]
영화 <매스>를 몇 차례 관람했습니다. 최근 개봉했던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를 비롯해서, 가해자와 피해자에 형성되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해주는 영화들이 연상됩니다. 책으로는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영화 작품으로는 <러덜리스>, <케빈에 대하여>도 생각나고 곧 개봉할 <플레이그라운드> 역시도 이런 관계에서 적어도 어느 한쪽의 입장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품이라서 이번 <매스>를 감상하신 분들께서는 나중에 여유가 되신다면 감상하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소재로 다룬 '총기 난사 사건'은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되풀이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총기 규제'라는 정치적 이슈와도 맞물려 문제의 본질보다는 정치적인 이슈와 스캔들이 더 우선시 되는 것 같아 매번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소재에서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이나 <엘리펀트>가 연상되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매스에서 눈에 띄었던 것들을 키워드로 정리하자면 [공간], [이해와 용서], [모른다] 정도일 것 같습니다.
1. 공간
먼저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매스>는 상영 후 대략 20분 정도를 피해자와 가해자의 부모가 대면하는 자리를 만드는 이야기에 할애합니다. '브리다 울'이 분한 '주디'는 교회에서 평상시보다도 더 깊고 한적한 장소에 자리를 마련합니다. 영화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접하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왜 이런 준비 과정에서 '주디'가 매우 부담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실만한 상황입니다. 그녀는 아무래도 이러한 상황이 일상적이지 않고, 어려운 자리임을 알기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과 의자 4개, 테이블 위에 놓이는 티슈나 창문에 비치는 아이들이 만든 스테인글라스 대용품인 하트 장식물마저도 그들에게는 신경 써야 할 대상입니다. 어려운 자리이기에 대화와 상대에 몰입할 수 있도록 다른 모든 것은 배제되고 오직 그들과 대화와 관계만이 존재해야 함을 영화를 본 분들은 이해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처음의 그 어색하고 어려운 시간마저도 이러한 대담이 이뤄지는 데 꼭 필요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외에도 '마샤 플림튼'이 연기한 '게일'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빈 공간을 응시하는 장면이라던가(아마도 아들에 관한 생각에 잠긴 것 같았습니다.), 가해자 부모를 문을 바라보는 자리이자 십자가가 걸린 벽 쪽에 앉도록 한 것이라던가, 테이블과 의자 위치 변화라던가, 떠난 줄 알았던 '린다'가 다시 등장하는 공간이라던가,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에 계시처럼 울려 퍼지는 찬송가 소리가 들리는 공간이라던가.(누군가에게는 종착지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제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연출) 영화 중간 중간 나부끼는 리본과 들판의 모습, 그리고 어둠 속 조명이 흐르는 변모의 공간이라던가.
영화는 영화라기보다는 4명의 연기자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연극처럼 느껴지지만, 그 바탕에는 이러한 공간에 대한 활용이 치밀하고 배려가 있어 보다 상황에 몰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부모들의 마음마냥 나부끼는 붉은 리본이 너무나 슬픈 곳에는 바람조차도 발을 들이지 못하듯 고요와 평안의 공간으로 바뀌는 연출은 정말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도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이기는 한데, 이 부분은 각자의 심상에서 해결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영화의 종교적 색체 덕분에 해석의 방향성이 보이기는 합니다.)
2. 이해와 용서
다음은 [이해와 용서]인데, 용서라는 키워드를 생각하면, 예전 영화 <밀양>을 보면 피해자는 끝없이 고통받고 살아가는데, 가해자는 이미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상황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또한 최근 <니 부모 얼굴이 보고싶다>의 마지막 참담한 부모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사실 여기에 나온 부모들은 모두 피해자입니다. 피해자의 부모인 '제이'와 '게일'은 처음부터 용서를 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영화 초반부의 '게일'과 '제이'의 대화에서 유추할 수 있고, 대신 해줄 수 있냐는 '게일'의 말에 '제이'가 하는 답변을 보면 '게일'이 '제이'보다는 그나마 내려놓은 상태로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게일'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영화 후반부에서도 드러나기는 하지만 살기 위해서 입니다. 상대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가족이 사는 것이 그 방법 밖에는 없다는 걸 긴 고통 속에서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들은 가해자의 부모와 만나게 되는 순간까지도 상대에 대한 분노와 의문, 그리고 미련을 놓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만나기 이전부터 용서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삶에 있어서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 혹은 연고자들이 만나는 것은 그렇게 추천되는 행위는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정보 보호와 우발적 사건 혹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서로를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들도 그런 시기를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6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만남에 이르렀고, 서로의 아이의 어린시절을 이야기하고 추억하고, 서로의 생각과 미처 몰랐던 입장들을 나누면서 비로소 이해의 영역에 이릅니다. 신문과 기사, 재판에서의 자료들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비롯해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마저 요구하고 서로 최대한의 존중을 통해 들어줍니다.
영화는 이들의 대화를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에 대해 말 그대로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밀도 높은 그 대화에서 단순히 정보를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에 동화되어 미처 영상 안에서 다 소진되지 못하고 떠도는 감정의 파도에 너울치게 됩니다.
이는 피해자 부모를 연기한 '마샤 플림튼(게일)', '제이슨 아이삭스(제이)' 뿐 아니라 가해자 부모를 연기한 '앤 도우드'(린다), '리드 버니(리처드)' 의 호연 덕분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미세한 표정의 변화와 떨림, 그리고 그것이 방출하는 에너지와 감정들은 111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그들의 이야기에 푹 빠지게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서로 달라보이기도 하고, 경제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 그들이 갖는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그들은 자식을 잃었다는 점에서 같이 아프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라는 점에서 서로에 대해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감정을 속일 수도 없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표현을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합니다. 어떤 관객의 입장에서는 가해자 부모의 태도가 우리의 정서와 맞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장에 이입할 수 있는 실마리는 각자 이들이 고통받아 온 시간은 벌써 6년이 넘었고, 이 시간이 생각보다 길고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게일'이 살기 위해서 이 자리를 찾았듯이, '린다' 역시도 이 자리가 간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린다'와 '리처드'는 끊임없이 사생활을 의심받고, 자신들이 일선을 벗어나지 않고 아이를 키웠지만 실패했음을 증명해야 했고, 낙인찍힌 자에 대한 악의와 증오, 호기심의 시선을 견뎌야 했으며, 가해자이자 적어도 자신들이 느끼기에는 피해자였던 자식을 제대로 추모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동시에 피해자와 피해자의 부모 혹은 그들의 사회에서도 유리되어 외부로 연결되는 메세지는 모두 정제되고 실수가 없어야 했고, 이는 그들이 가진 진심와 망연자실하고 동시에 피해자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마저도 전달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어찌보면 자신들의 인생을 망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느끼는 진심은 아들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하기에 결코 남에게는 이해받을 수 없는 감정을 마음 속 깊숙히 간직한채로 비로소 이 자리에서야 토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일'에게도 이 자리는 필요했던 자리였지만, '린다'에게도 역시 중요했던 자리였습니다.
깊은 상실감과 허망함, 그리고 갈 곳 없는 증오와 자신을 향한 책망, 그리고 아이에 대한 그리움. 비록 가해자와 피해자 부모라는 입장이 있지만, 그들이 마음 속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아픔과 사랑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이해와 공감이 있었기에 '게일' 그리고 '제이'는 비로소 '용서'를 통해 조금이나마 나아진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린다'와 '리처드' 역시도 그러하지 않을까. 그저 말뿐인 용서와 이해의 공간이 아니었던 것은 그들이 그 어색하고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진심을 다해 서로 소통하려고 했던 용기 덕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3. 모른다
마지막 키워드는 [모른다]인데,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 되는 이유는 단순히 '총기규제'와 관련된 법안의 미비 때문이나 정치적 이슈의 다툼 때문만이 아니고, 서로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사회의 문제 뿐만도 아니고, 아이에 대해 여느 부모처럼 여겼던 부모의 실패 때문만도 아니며, 가해자 그 자체의 문제만도 아니라는데 있지 않을까. 너무나 복잡하고 상황마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말 '알 수 없다', 혹은 '모른다'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에서도 언급되는 정치적인 면, 사회 혹은 공동체, 학교, 가정, 개인(사이코패스) 등만의 문제라고 보기에는 어떤 사건은 말 그대로 인간의 예지와 노력을 벗어난 사고의 영역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른다'라는 것을 인지하고, 단정짓지 않으며 계속 사고하고 소통하고 이해하려 노력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도 우리는 '모르고', 벌어진 이후에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고, 단정짓고, 편견이 작용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종종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이런 일 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이러한데 말 그대로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며,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은 인지하고 알기 위해 소통하고 진심을 다하는 수 밖에는 없어 보입니다.
영화가 내놓은 해답이 정답인지 알 수 없고 모두 공감할 수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영화가 제시한 적나라한 이야기들의 흐름에서 작은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영화 <매스>는 여러 차례 관람하기에 쉽지 않은 영화입니다. 그 감정들과 생각들이 쉬지 않고 부딪히는 것을 단순히 목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에서 마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매스>를 추천하는 것은 최근까지 나왔던 많은 영화들에서 이렇게 적나라하고 입체적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과 작품이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며, 다시 이런 작품을 마주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추천인 9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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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직사관님, 내일도 행복한 하루되세요!
기대하시던 분들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케이시존스님 댓글 감사합니다. 내일은 포근한 하루 되세요 ㅎ
TH0RMAS님, 댓글 감사합니다! 안온한 하루되세요!
멋진 리뷰 잘읽었습니다. 감정이 휘몰아쳐서 전 아무 정리도 못하겠더라구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