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 하얀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 (약스포)
간혹 영화 줄거리보단 소도구나 풍경에 어쩐지 시선이 가는 경우가 있다. 이 영화의 경우도 그렇다.
매스는 작은 동네 교회 뒷편의 작은방이 무대다. 교회 집사와 직원이 곧 도착할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다. 교회 프로그램 중 하나로 특정한 목적을 위해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 아니라도 장소를 제공하는 듯하다. 외부서 온듯한 코디네이터가 티슈곽을 어디 놓을지 세심히 결정하는 것으로 미뤄보아, 작고 평화로운 방에 눈물과 감정 폭풍이 몰아칠 것을 암시한다.
교회 집사는 방 한가운데에 4명이 앉기 충분한 크기의 백색 원탁을 배치한다. 빛이 잘 드는 창가에 큼지막한 그리스도 십자가상에 벽에 걸려있다. 원탁은 원래 교회에 있던 가구겠지만, 카메라샷을 보건데 의미심장하다. 순백은 죄없음 순결함 등을 상징한다. 영화를 보다보면 대사나 동작에 일체의 낭비가 없는 것을 보아 이 원탁에도 감독의 철저한 계산이 들어갔으리라.
원탁은 둥글다. 원은 중앙서 모두 같은 거리를 가지는 점들로 이뤄진다. 그래서 어느 점에서 시작하던 빙돌아 결국은 만나게 된다. 원모양으로 만든 탁자에 앉으면 누구든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사각지대 없이 앉게 된다. 그래선지 사각형의 탁자에서 식사를 할때와 원탁서 할때 친밀감의 거리가 다르다.
원탁하면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가 떠오른다. 사각의 긴 탁자는 계급과 위상에 따라 왕 주변에 앉게 되니, 탁자 말단에 있는 상대와 직접적인 소통은 어렵다. 자리를 이동하거나 중간에 누군가를 통해야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 아더왕은 커다란 원탁으로 어느 누구도 의견을 놓치지 않고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래서 원탁은 누구나 평등의 기회를 가진다.
또한 원은 순환의 흐름을 지닌다. 원탁의 기사가 떠오르니 절로 작년초 감상한 <그린나이트>가 생각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한 원탁 뿐만 아니라, 달력 및, 왕관 등을 통해 끝임없이 원을 강조한다. 영화속 스케치처럼 등장한 저잣거리의 인형극에서 월례노동의 삽화 조각들이 원의 순환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드러낸다. 아더왕의 조카인 게웨인은 결국 돌고 돌아 약속된 시간이 되자, 녹색기사를 찾아가 어떤 운명이던 순응할 준비가 된다.
이 원탁에 앉을 4명은 서로를 알지만, 불편한 타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가해자와 피해자 부모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교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 후 6년만에 마주한다. 미성년 자녀의 관리 소홀 및 피해보상으로 소송이 오가는 법정이 아닌데, 대척점의 있는 그들이 대면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들은 원탁에 앉아 처음엔 근황을 묻다가, 점점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각자 그 사건서 트라우마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아픔과 고통이 있고, 여전히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다. 가해자 부모는 범죄 당사자는 아니나 미성년의 자녀는 부모의 책임하에 있기에, 세간의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헤이든은 학교폭력의 피해자 였으나,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해 11명을 살해하고 자살하면서 책임을 회피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용서할 수 없다.
어째서 그런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살인범 헤이든이 애초에 사이코패스였는가? 헤이든의 부모가 관리 소홀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그들은 지난 상체를 다시 파헤치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짚는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다. 그런다고 죽은 자식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 없다.
피해자 부모는 가해자 부모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특히 고통받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편 고통에서 벗어나 상처를 치유하고 지옥같은 현실서 구원받고 싶다. 추궁은 하지 않기로 사전에 약속했지만, 고통을 토해내면서 고성이 오간다. 서로를 대면하고 있기 거북해선지, 한명씩 원탁에서 이탈하며 서있거나 가장자리에 있는 쇼파에 앉는다. 간간히 교회 밖 들판에 둘러싸인 철망과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리본 두개가 스산한 부모의 마음을 어쩐지 대변하는 듯하다.
피해자 부모는 미국의 총기사고는 매해 발생하지만, 아들의 죽은후 세상은 달라진 것이 별반 없는 것 같다. 아들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런데 출구가 보이지 않던 막다른 지점서 해결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국 보편의 사고방식으로 너무도 이성적이라 뻔뻔해 보이던 가해자 부모가 아들의 유산을 일깨운다. 아들이 짧은 생애 동안 부부에게 남겨준 기쁨과 기억들이다.
결국 피해자 부모는 종교 안에서 용서를 찾는다. 영화 초입부터 어떤 말을 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말을 하기까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인다. 용서를 하면서 자신과 가족들과 화해를 하고,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남은 생애 고통스럽고, 기독교 안에서 훗날 아들을 다시 만날 기회가 멀어질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들은 이 극적인 순간 원탁을 벗어났으나, 둥그럽게 원을 그리며 앉는다.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며 가까워진 순간일 것이다. 각자의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듯 기도를 한다. 그리고 다시 원탁에 모여 모임의 마지막을 고하고 인사를 한다. 영화 막바지에 교회서 주말을 위해 연습하는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위안을 주는 것 같다.
감독은 백색원탁을 통해 신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듯하다. 신 아래서 모두가 죄인이나, 그 죄인들 가운데서 경중이 있다. 또한 시간은 흘러서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것도 의도한 것 같다. 원의 순환처럼 시간이 흘러 모임은 끝을 맺는다. 피해자 부모는 용서를 통해 마음의 짐을 덜었지만, 가해자 부모는 여전히 회환과 죄책감에선 벗어날 수 없는 듯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이 그들이 짊어진 십자가이며, 여전히 매일을 살아가야한다.
비록 교구에 등록된 교인은 아니지만, 치유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의 프로그램 중 하나같다. 앞으로 비슷하거나 다른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그 백색의 원탁서 이야기를 나눌 것이고, 거기엔 많은 이야기가 담겨질 것이다.
치밀하고 이성적인 접근이라 그런지,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가슴속 찌르는 듯한 슬픔은 아쉽게도 느끼지 못했다. 눈물이 흘릴 뻔한 순간이 있다면 제이슨 아이삭이 아이가 마지막에 느낀 고통의 시간의 묘사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백미를 꼽는다면 모든걸 내려놓고, 용서를 언급하는 핌프턴의 얼굴이였다. 하지만 총기사고가 빈발한 미국은 아마 다가오는 감정의 깊이가 다를 것이리라.
성난 12인 및 엘리펀트에 깊은 영향을 받은 듯한 촘촘하게 짜여진 각본과 배우들 호연으로 영화는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이것이 프랜 크랜즈 감독의 데뷔작이라니 앞으로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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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캐빈 인 더 우즈> 배우였다는 거 알고 깜짝 놀랐어요. 영화 속에서 괴짜 캐릭터였던... 앞으로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