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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어나더 라운드' 간단 리뷰

수위아저씨
1306 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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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년남성에게 발기부전은 흔한 일이다". 이 말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미국 최대 군수기업 대표 토니 스타크가 한 말이다. 공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의외로 비뇨기 의학에도 지식이 해박했던 모양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중년남성 5명 중 1명은 발기부전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말을 할 당시 토니 스타크는 발기부전을 겪고 있었을까? 토니 스타크가 스스로를 소개할 때 한 말처럼 그는 천재, 억만장자, 독지가, '플레이보이'다. 돈 많고 풍류를 즐기고 걱정도 없던 이 중년남성에게 발기부전이 있었을까?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확실히 뉴욕 전쟁 이후에 발기부전이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페퍼 포츠와 뚜렷한 부부생활도 없이 악몽에 시달리다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작업실에서 수트만 잔뜩 만든다. 시간이 흘러 그는 뉴욕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자 예쁜 딸을 얻게 된다. 토니 스타크의 발기부전 원인은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책임감 때문에 울트론도 만들었고 E.D.I.T.H도 만들었다. 무거운 근심과 걱정은 남자의 자존심을 시무룩하게 한다. 

 

2. 미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덴마크에 중년남자 마르틴(매즈 미켈슨)이 있다. 그는 천재도 아니고 억만장자도 아니고 독지가도 아니고 '플레이보이'도 아니다. 고등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고 반항적인 두 아들을 키우는 가장이다. 야간근무가 잦은 아내와는 하루에 10분도 얼굴을 보기 힘들다. 마르틴은 대화를 나누고 싶고 기대고 싶지만, 마땅한 상대가 없다. 게다가 자신이 책임지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일도 시원치 않아서 학부모들에게 소환당하기도 한다. 가장의 무게감과 입시를 앞둔 선생님의 무게감이 마르틴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마르틴의 자존심은 시무룩한 상태다. 이때 동료교사 니콜라이(마그너스 밀랑)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혈중알콜농도 0.05% 정도를 유지하는 것은 자존감을 높여준다". 그때부터 마르틴과 니콜라이, 그리고 또 다른 동료교사 톰뮈(토마스 보 라르센), 페테르(라스 란테)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최소한의 알콜 섭취에 나선다. 

 

3. 시작은 좋았다. 수업에 조금은 자신감을 찾았고 아내 앞에서도 조금은 당당해졌다. 특히 마르틴은 자신감을 찾으면서 발기부전도 해결한 모양새다. 술이라는 무기는 이 중년남성들에게 자신감을 안겨줬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이 중년남성들을 무모하게 만들었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발기부전 중년남성들이 무모해지는 과정을 쫓을 필요가 있다. 배경설명이 다소 부족한 페테르를 제외하면 마르틴과 니콜라이는 가장으로서 입지가 거의 사라진 상태다. 마르틴의 아이들은 아빠가 어디 나가도 신경도 쓰지 않고 니콜라이의 아이들에게 니콜라이는 '화장실'이다. 아내와 헤어진 톰뮈는 늙은 개를 키우는 것이 집에서 유일한 일꺼리다. 이들은 모두 권위를 잃어버리며 자존감이 추락했고 이는 일에서의 자신감 하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가장으로서 책임감과 외로움, 상실감을 온전히 감내하고 있어서 자존감이 떨어져버렸다. 억만장자인 토니 스타크가 짊어진 무게만큼은 아니지만, 소시민인 이 중년남자들도 그 나름대로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가장이기 때문에. 

 

4. 술에 취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술은 보고 들은 것을 뇌로 인지하는 과정을 무뎌지게 한다. 분명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지만, 그것이 뇌에서 온전히 인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취한 사람들은 '블랙아웃'을 겪는다. 보고 들은 것이 온전히 인지된다면 사람은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두려움은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대상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기에 가능하다(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중 의외로 겁쟁이가 많다). 술은 두려움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무기다. 다만 두려움과 싸워서 이기는 게 반드시 '용기'만은 아니다. 술은 두려움을 상상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리는 방패와 같다. '어나더 라운드'에서 언급한 '혈중알콜농도 0.05%'는 두려움을 차단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인 듯 하다. 두려움과 맞서서 이긴 중년남성들은 승리의 쾌락을 맛봤다. 발기부전이 해결됐고 이는 승리에 대한 갈망을 해소시켰다. 승리의 쾌락을 맛본 중년남성들은 더 강한 쾌락을 찾게 된다. 이것은 '중독'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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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중년남성들은 '중독'에 이르진 않는다. '신이 도우셔서' 중독에 이르기 전에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래도 정신 똑바르고 선량한 중년남성들이라 곤욕을 치르고 정신이 번쩍 들어버린다. 딱 1명, 톰뮈만 빼고. 술을 끊지 못한 톰뮈는 직장도 잃게 되고 목숨도 잃어버린다. 항상 어울려 다니던 4명의 친구들 중 1명이 사라졌다. 특히 마르틴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유쾌하게 술 마시고 밤새 어린 아이처럼 놀던 친구들에게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술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이들은 친구의 관을 실어나르고 다시 술 앞에 앉았다. 이들은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른 후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처럼 다시 자신감없는 중년남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제 이들은 술 없이도 자신감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랬던 이들이 친구의 장례식 이후 다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이때부터 술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때의 술은 위로와 축하를 건네고 삶을 조금 부드럽게 하는 윤활제와 같다. 술맛이 변한 것일까? 술이 변하지는 않는다. 술을 마시는 사람의 마음이 달라질 뿐. 

 

6.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술에 대한 영화다. 술은 인간에게 쾌락을 상징하는 가장 보편적인 물질이다. 이는 영화에도 언급한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와 이어진다. 덴마크 영화인 '어나더 라운드'에서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을 3단계로 나눠 설명했다. 영화가 내내 표현하는 것은 '심미적 실존'에 가깝다. 심미적 실존은 인생의 의의가 행복에 있고 행복은 쾌락의 최고 정점을 의미한다. 여기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윤리적 실존'이 있다. 사회적이고 시민적인 생활태도를 갖는 양심적이고 건전한 실존이다. '어나더 라운드'의 중년남성들은 심미적 실존을 거쳐 윤리적 실존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은 '종교적 실존'으로 향해야 한다. 윤리적 실존에 유한성을 느낀 인간이 하나님과 대면하려는 의지를 말한다. 그러나 이 중년남성들은 종교적 실존에 이르지 않는다. 그들은 톰뮈의 장례식을 위해 성당에 갔지만, 다시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톰뮈의 장례식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종교적이었던 순간이다.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7.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 철학자다. 그 시대의 철학자를 공부할 일은 철학과 1학년 1학기에 배우는 '세계철학사'가 거의 유일하다. 서양철학에 관심이 많아서 본격적으로 실존주의를 공부하더라도 그것을 책 밖으로 꺼낼 일은 없다. (철학과 졸업생피셜) 철학책은 전부 죽은 사람이 했던 말에 불과하다. '어나더 라운드'는 그렇게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를 부정하고 있다(사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를 비판한 기독교인이다. 이건 더 복잡해져서 일단 생략하겠다). 덴마크 국가를 부르며 거창하게 떠나보낸 톰뮈는 술 마시고 구명조끼도 안한 채 보트를 타다 바다에 빠져죽었다. '어나더 라운드'는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자국에 대한 비판정서가 깔려있다. 역사수업 시간에 자국의 역사를 배우는 장면이 나오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영화에서는 '세계사', '국사' 구분이 없이 '역사'라고 말한다). 얼마 전 지인과 했던 농담: "작가주의 감독 중 자기 나라에 우호적인 사람은 레니 리펜슈탈밖에 없을 거다". 

 

8. 결론: 국가는 허망하고 종교는 누구도 구원해주지 않는다. 그저 개인을 구하는 것은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대화. 그 대화를 더 풍요롭게 하는 술 한 잔이 전부다. 마시고 춤추고 즐기는 비언어적 행위가 사람의 마음을 구한다. 자존감도 구하고 발기부전도 치료한다. 토니 스타크와 이 중년남성들의 자존감이 시무룩해진 원인은 다양하지만, 결국 근심과 걱정을 덜어내고 행복에 이른다면 학생들 앞에서 현란한 댄스를 선보일 정도로 시무룩해진 자존감이 벌떡 일어설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건 중요한 문제다. '심미적 실존'은 그래서 중대사항이다. 

 


추신) 영화 내내 자존감이 시무룩해진 중년남성이었던 매즈 미켈슨은 장례식 장면 이후 검은 수트에 검은 셔츠, 검은 넥타이를 맨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수트빨을 받자마자 멋있어졌다. ...이거 미스캐스팅 아닌가?(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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