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파스트 (2021)
스포일러 넣지 않고 인터넷에 지금 있는 정보 정도만 노출시키려 하였는데, 그래도 찝찝하신 분은 아래 글을 피하시는 것이 좋겠다.
케네스 브래너가 1989년 헨리5세라는 영화를 들고나왔을 때 그에 대한 기대는 엄청났다. 당시 말론 브란도에 비견되는 로렌스 올리비에 그리고 일세를 풍미한 리처드 버튼 이후 영국 대배우의 맥이 끊겼음을 탄식하는 소리가 높았다. 케네스 브레너를 두고, 마침내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천재배우다 탄생했다 하는 식으로 찬사가 쏟아졌다. 당시는 지금보다도 영국배우들의 위상이 높았던 것 같다. "그들을 이길 수 없어요. 그들은 셰익스피어 희곡을 전부 줄줄 외운다니까요?"하는 메릴 스트립의 말이 신문지상에 인용되기도 했다. 그때 기억때문인지, 케네스 브레너가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한번씩 유심히 보게된다.
캐네스 브래너가 벨파스트 출신인 것은 이번에 알았다. 그 갈등과 폭력, 식민지적 모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대립 등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약고 한가운데에서 그가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이 영화 벨파스트는 그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존 포드 감독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 영화치고는 굉장히 힘을 빼고 담담하게, 어느 평범한 일가가 갈등과 폭력의 도가니 한복판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시대 그 상황을 겪었던 사람만이 이렇게 섬세하고 내밀하게 당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리라. 이 영화는 그 무엇보다도 호소력 있는 경험으로부터 큰 힘을 끌어올린다.
영화는 선명한 칼라화면으로 오늘날 벨파스트를 공중에서 잡는다. 벨파스트의 여기저기를 보여준다. 그러다가 갑자기 흑백화면으로 바뀐다. 1960년대 벨파스트다. 평범한 소년 버디가 주인공인데, 케네스 브래너의 어린 시절을 반영하는 존재이리라. 케네스 브래너는 버디의 입장에서 영화를 구성한다. 카메라는 버디 키에 맞는 높이에서 계속 촬영을 한다.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어른들을, 계속 아이 높이에서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머니 역으로 나오는 카트리나 밸프가 얼마나 키가 큰 지 모르겠지만, 영화 속에서는 아주 키가 큰 사람으로 느껴진다. 성당에 갔는데, 신부가 무서운 목소리로 신교도들에게 적대적인 연설을 하고 클로즈업으로 신부의 성난 입만 보이는 것도 다 어린 버디의 인상을 반영하려는 것이리라. 캐네스 브래너는 버디 입장에서 1960년대 벨파스트를 바라보기 위해 여러가지 영화적 장치를 해놓는다.
이 영화에서 캐네스 브래너는 애틋하다고 할 정도 감정을 가지고 버디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 그린다. 아마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떠올린 것일까? 여기 나오는 버디의 아버지 어머니는, 버디 눈에나 나이 들고 현명하고 어른스러워보이지 사실 젊은 사람들이다. 세상 경험이 풍부하지도 않고, 폭력적으로 휘몰아치는 사회 속에서 안간힘 써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노력한다. 어쩌면 어린 버디보다 더 괴롭고 아프고 무서운 사람들이 그들이리라. 하지만 그들은 아버지 어머니다. 자신들끼리 테이블에 앉아 이것저것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들도 걱정 많고 두려워한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 아이를 지키러 돌맹이가 쏟아지는 거리 한복판으로 용감하게 달려나가고, 아이를 지키러 거리를 두렵게 하는 지역 갱단과 맞짱을 뜬다. 캐네스 브래너는 이런 젊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한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길거리에 턴테이블로 음악을 틀고 남녀들이 나와 춤을 춘다. 아버지 어머니도 나와서 춤을 춘다. 아버지 어머니는 놀랍도록 젊다. 그들은 마치 대학생 졸업파티에 춤을 추는 대학생들처럼 보인다. 캐네스 브래너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아버지 어머니, 당신들은 그때 이렇게나 젊으셨군요. 아이에게 자기들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기 위해, 이 빛나는 시절의 대부분을 희생하셨군요."
세금은 밀려 국세정 직원이 독촉장을 보내오고, 집주인이 집세를 받으러 오는 날에는 문 잠가놓고 아무도 없는 척하고, 지역갱단에서는 보호금을 내라고 하고, 젊은 아버지 어머니가 견뎌내기에는 시련이 너무 가혹하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해외로 이민갈 돈을 모으려 노력한다. 아이들을 이런 폭력적인 장소로부터 탈출시켜 키우기 위해. 상황은 점점 더 악회되어가고 폭력적인 사회로부터 중립을 지키려는 이 가족들을 궁지로 몰아간다.
이미 젊은 시절을 영국에서 보내고 귀향한 할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한다. 어쩌면 할아버지도 수십년 전 같은 상황에서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을 강요받았을 지도 모르겠다. 담담하면서도 현명하고 가족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할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 키어런 하인즈의 연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인생의 끝을 내다보면서, 가족을 위해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아들을 이해하고 가슴 아파하며,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려는 손자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는 할아버지 연기를 정말 훌륭하게 해냈다.
벨파스트는 시네마 천국을 어느 정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기 어린 시절에 고전영화 장면들을 오버랩시키는 것 말이다. 게리 쿠퍼의 하이눈, 존 웨인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라켈 웰치의 공룡백만년, 딕 반다이크의 치티 치티 뱅뱅 등, 자기가 어릴 적 보았던 영화들이 계속 나온다. 벨파스트라는 좁은 장소에 살던 버디에게 바깥세상에 대한 꿈, 보다 넓고 멀고 환상적인 것에 눈을 돌리게 했던 것이 영화다. 이것도 캐네스 브래너의 경험을 반영한 것일까? 이 장면에는 노스탤지어와 그리움이 흐른다.
아주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들아, 앞으로 나아가라. 뒤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할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로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이 말이 전해진다. 이 영화의 주제이자 이 영화가 도달한 깊이와 넓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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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먼저 보셨군요. 기대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