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O) 영화 [어나더 라운드] 익무 시사회 인증+후기
(* 아래 내용은 꽤 자세히 영화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스포 없이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읽지 않으시길 권해드립니다.)
(1) 삶에 권태가 찾아온 40대 중년 남성 마르틴과 그의 친구들이 "일상생활에 혈중알코올농도가 0.05%만 유지되어도 삶이 달라진다"라는 어느 학자의 가설을 실험해보는 이야기다. 하지만 실험은 거들 뿐, 사실 위축되고 자신감 없어진 자신의 모습을 술의 힘을 빌려 ‘변신’시키거나, ‘예전’으로 되돌아가 보려고 하는 이야기다.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마르틴. 그러나 학생들 눈에 마르틴은 그저, 의욕도 없고, 수업도 지루하게 하는 ‘따분한’ 선생님이다. 마르틴이 집에 돌아가서도 마찬가지다. 야간 업무를 자주 하는 아내와는 대화 한 번 제대로 하기 힘들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외면한다. 가족 구성원에게도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주눅 들어 있다. (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절친의 생일날. 오랜만에 맛있는 술을 마셔보자며 각양각색의 술을 주문하는 와중에도 마르틴은 무알코올 음료만 홀짝인다. 그러다 문득, 마르틴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계속 마시지 않겠다고 거절하던 술을 돌연, 받아 마신다. 잔을 들고, 와인을 원샷한다. 이 이야기의 도화선이다.
술을 마셔본 사람들은 아마 모두가 알 거다. 술이 한 잔 몸에 들어가는 순간, 알코올이 몸에 쫘-악, 혈관을 타고 손가락 끝까지 조금씩 퍼지는 듯한 그 느낌을 ─ 도수가 높을수록 더 확실한 느낌을 안겨준다. 몸에 조금씩 열도 오르고, 알코올이 뇌까지 퍼지면 순간, 주변에 아무것도 안 느껴지고, 술을 마신 나의 감각만이 느껴지는 순간. 덩달아 기분도 조금씩 좋아지고, 무언가 긴장하던 것들도 스르르 놓게 되고, 왠지 눈꺼풀에 들어간 힘도 조금 느슨해지는. 이 즐거움을 한 번 제대로 맛보면 때로는 멈출 수 없다. 다시 그 감각을 찾고 싶어진다. 마르틴은 오랜 시간 닫아두었던 와인 마개를 열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생일파티는 진작 끝났지만, 마르틴은 오랜만에 느껴본 그 감각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최근에 아무 이유 없이 기분 좋았던 적이 또 있었던가? 하면 떠올리기 쉽지 않다. 다시 지루하고 무료한 수업에 들어가야 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어제 친구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일상생활에 알코올 농도 0.05%만 채워보라"라고 했던 어느 학자의 가설. 몰래 사 온 술을 화장실에서 깐다. 꿀꺽-꿀꺽. 어제의 그 감각이 다시 온몸에 돈다. 그래. 진짜인지 한 번 시험해 보는 거지. 알코올이 정말 삶을 바꾸는지 아닌지.
(2) 그렇게 마르틴과 친구들은 본격적으로 실험한다.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시간에는 계속 술을 마셔서 0.05%의 혈중알코올농도를 유지하되, 밤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걸로. 수업 내용을 듣는 듯 마는 듯했던 학생들이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해준다. 학생들이 웃는다. 나도 재밌다. 갑자기 자신감도 생기고, 지금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야. 그 학자 말이 맞는 것 같은데?
한 번 자극을 느끼면, 다음은 같은 자극에 반응하지 못한다. 필연적으로 자극은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처음엔 0.05%의 알코올 농도에도 즐거워하던 넷은 점점 더 알코올 농도를 높인다. 실험을 더 심화시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더 큰 자극을 원해서다. 점점 더 술을 자주 마시고, 점점 더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고, 처음 실험 조건을 부숴버리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더 지금의 나를 내려놓고 싶고, 더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
"건강했던 사람이 병에 걸리면, 의사는 그에게 예전에는 건강했지만, 지금은 병이 생겼다고 이야기해줄 수 있다.
하지만 절망은 이와 다르다. 절망이 생겨났다면, 이미 오래전부터 절망의 싹이 존재한 것이다."
─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이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는데 주변 사람들이 모를 수 있을까? 적어도 마르틴과 친구들은 ‘몰래’, 비장의 무기로 술을 마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단 몇 잔만 마셔도 냄새가 나고 눈빛도 행동도 다른데 모를 수 없다. 묘하게 핀트를 벗어난 말과 행동들. 결국,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들이 말한다. 아버지 요즘 계속 술 마시고 계시잖아요. 아내가 덧붙인다. “당신이 여기에 없는 것 같아.”
찰나는 즐겁고, 원래의 나로 되돌아온 것 같고, 꼭 변신한 것만 같다. 하지만 본질은 오래, 깊게 취할수록 나는 붕-뜨고 발을 땅에 디딜 수 없게 된다. 어쩌면 마르틴은 술을 마시기 한참 전부터 ‘여기’에 없고, 땅에 발을 제대로 딛지 못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절망이 생겨났다면, 이미 오래전부터 절망의 싹이 존재한 것이다.”라고 했던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불안은 인간을 움켜잡고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생경한 힘이다.
하지만 누구도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없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두렵기 때문이지만, 우리는 두려워하는 것을 욕망한다.
불안은 개개인을 무력하게 만든다."
─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The Concept of Anxiety)
(3) 자신의 삶에 권태를 느끼고, 만족스럽지 않았던 마르틴과 친구들의 심연에는 무엇이 있을까. 영화는 그 힌트를 키르케고르 이야기를 꺼내면서 알려준다. 키르케고르는 영화 가장 첫 시작의 인용구, 그리고 면접에서 또 떨어질 것 같다고 불안해하던 세바스찬 학생이 면접을 보러 들어간 곳에서 언급된다. 면접에서 세바스찬에게 묻는 건 키르케고르 철학의 핵심 중 하나인 ‘불안의 개념’이다. 그저 불안해하는 세바스찬에게 자신들이 경험해본 ‘혈중알코올농도 0.05%의 실험’ 비법(?)을 알려주었고, 그리하여 학생이 술을 물처럼 마시는 장면을 단순히 농담처럼 넣은 씬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 장면에서 세바스찬의 입을 빌린 ‘불안의 개념’은 영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의 심연에는 ‘불안’이 있다. 술을 마셨더니 삶이 즐거워졌다는 건 반대로 무언가 다른 것에 기대지 않으면 삶이 전혀 즐겁지 않다는 뜻이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출근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집으로 일찍 돌아와 다시 저녁을 먹고 잠드는 삶이 반복되는 일상. 평온해 보이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은 날들. 모든 수식어와 상황을 모두 채로 걸러낸 뒤에 남은 건 불안한 한 인간이다.
마르틴과 친구들은 그것을 전혀 ‘불안’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았지만, 삶의 불만족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야기한다 ─ 키르케고르는 불안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으며, 인간이 그 개념에서 해방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말이다 ─. 아주 약간의, 술의 힘을 빌려 즐거운 일상을 되찾고자 했지만, 그건 회피이지 명확한 해법일 수는 없다. 오히려 더 큰 불안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수단이 되었다.
DRUK, 만취했던 넷이 다시 발을 땅에 디디고 정신 차렸을 때, 마주한 건 거대한 책임과 상실이었다. ‘오직 넷만 비밀인 줄 알았던’ 교내 음주 사건이 학교에서 정식으로 문제 제기 되었고, 마르틴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잃었다. 충동을 참지 못하고 내지른 찰나의 화가 가족을 떠나보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더 이상, 술을 마시고 저지른 실수와 치기를 용인할 수 있는 어린 학생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마르틴은 친구를 영영 잃었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토미가 결국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만취의 파도가 지나간 곳엔 지독한 고독, 상실, 그리고 절망만이 남아 있다.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다. 이런 불안만이 신앙을 통해 완전히 교육적인 기능을 한다.
이런 불안은 모든 유한한 목적을 파괴하고, 그 목적들의 기만성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불안을 환영하고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또 독배를 기꺼이 들어 올렸던 소크라테스처럼,
그는 불안과 함께 한 방에 앉아, 수술을 앞둔 환자가 의사에게 말하듯이, '이제 준비가 끝났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불안은 그의 영혼에 들어가 샅샅이 수색하며, 유한하고 하찮은 것을 빠짐없이 그로부터 몰아낸다.
... 따라서 우리가 불안을 통해 신앙을 배우게 되면, 불안은 스스로 잉태한 것을 빠짐없이 없애버릴 것이다."
─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The Concept of Anxiety)
(4) 토미의 장례식을 끝낸 세 친구는 다시 식당에서 한 잔 마신다. 그를 애도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남은 자들을 서로 위로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토미의 장례식이 열리는 날은 학교의 졸업식이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식당 밖 광장에서는 자유의 몸(?)이 된 학생들이 너도나도 즐겁게, 마음껏 술을 들이붓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르틴과 친구들은 기꺼이 밖으로 나가 그들과 함께 축제를 만끽한다. 마르틴은 더 신나게 술을 마시고, 더 즐겁게 뛰어다니고, 멈추어 서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온전한 불안을 마주하고, 절망을 맛본 사람에겐 더 이상 그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고독, 상실, 절망의 바닥에서 마르틴은 삶의 자유를 얻는다. 모든 걸 내려놓은 마르틴은 이제 홀가분하다. “What a life, what a night. What a beautiful, beautiful ride. Don't know where I'm in five but I'm young and alive. Fuck what they are saying, what a life.” …… 아직 젊고 살아 있으면 된 거죠. 남들이 하는 말은 필요 없어요. 멋진 인생이에요. 심연에 가라앉은 불안을 회피하기 위한 만취가 아니라 오늘, 현재, 지금 이곳의 나를 위한 만취. 비로소 제대로 시작되는 인생의 축제이자, 삶의 어나더 라운드. “현재는 영원한 것이며, 충만하”기에.
* 결국, 영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삶에 대한 찬가인 것 같아요. 온전한 불안을 마주하고, 절망을 맛본 인간이야말로 온전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이게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불안의 핵심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그 내용이 영화 잘 담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바닥을 찍었으니 오히려 더 홀가분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실존주의를 잘...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알베르 카뮈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격인 키르케고르의 철학이 담긴 영화라 더 재밌게 본 것 같기도 해요. 결국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담론이니까요. 키르케고르는 언제나 희망을 이야기했다는 점도, 이 영화의 엔딩과 비슷한 것 같아요. 영화 속 마르틴이 정말 모든 걸 훌훌 떨쳐버리고 홀가분해 보였거든요.
** 영화 보는 내내 맥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요. 영화관에서 맥주는 왜 못 마시는 걸까, 하면서 계속 끝나고 술 마실 생각을 하느라 영화를 제대로 봤는지도 모르겠네요 ㅋㅋㅋㅋㅋㅋ 영화 끝나자마자 빛의 속도로 편의점으로 달려가 4캔 만 원 하는 맥주 세트를 사고, 감바스 안주 만들어서 벌컥벌컥 마셨어요. 그리고 이 영화를 본 뒤로 냉장고에 맥주 캔이 떨어지지 않는 현상이 발생... 본격 음주 조장 영화가 아닌지. 계속 술을 참던 마르틴이 와인을 원샷하는 순간, 왜 이렇게 쾌감이 느껴지는지요. 혼자 속으로 그라췌! 이런 추임새를 ㅋㅋㅋㅋㅋㅋ 이거 쓰는 동안에도 맥주를 한 캔 사와야 하나? 이러고 있네요. 맥주를 마시면 마실수록 이 영화가 좋아지는데 큰일이네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보고 많이 마실지.
*** 문제는 회피하지 말고 오롯이 마주해야 한다는 내용은 <드라이브 마이 카>와도 맞닿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드마카가 상처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어나더 라운드>는 삶을 불안하게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해요. 결국 ‘잘’ 살기 위해서는 도망가면 안 되나 봐요. 어떤 것에서든. 약간 회피형 성격인 저에겐 뼈아픈 교훈을 주는 영화들이네요 ㅋㅋㅋㅋㅋㅋ
**** 개인적으로 영화를 처음 본 뒤에 느꼈던 것들을 최대한 자세히 기록하려고 하다 보니 리뷰가 좀 늦어졌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절대 다시 못 쓸 것 같아서요 (영화를 다시 본다고 해서 처음 느낀 감상이 온전히 살아 돌아오지는 않더라고요) 아무튼 이렇게 좋은 영화를 일찍 만날 수 있도록 시사회 표를 나눔해주신 이팔청춘 익무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영화 잘 보고 왔습니다!
절망에 이르는 병.. 많이 들어본 말인데
키르케르고였군요.
영화 놓치지 말아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