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무 신입의 인생 영화 (2) 9위 ~ 1위
9위 . 영광의 길
큐브릭의 세계관을 이 영화로 처음 접했습니다. 전쟁은 늙은이들이 일으키고 젊은이들이 죽어 나간다는 말이 안타깝지만 딱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전쟁이라는 방대해질 수도 있는 소재로 짧은 러닝타임에 이런 명작을 만드는 큐브릭, 안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8위. 초여름(오즈 야스지로, 1951)
오즈 감독의 묘비명에는 없을 무(無)자만 적혀 있습니다. 특히 그의 후반기 영화들에는 삶의 덧없음이 짙게 표현됩니다. 오즈가 자주 이용하는 기차라는 상징물이 여기서도 나옵니다. 기차 장난감인 줄 알고 아빠의 짐을 열어본 아이가 식빵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아이도 어른이 되면 기차에 직접 몸을 싣고 식빵을 사갖고 오는 가장이 되어있을 겁니다. 한 집안의 가장에서 나중엔 <동경 이야기>처럼 여러 사람을 떠나보내고 홀로 먼 곳을 바라보며 부채질을 할 우리들의 초상을 이 감독은 무심하게 보여줍니다.
7. 카메라를 든 사나이(지가 베르토프,1929)
소련에서 탄생한 무성영화계의 걸작입니다. 지휘자가 된 감독이 선보인 훌륭한 오케스트라 같은 영화입니다. 언뜻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클로즈 업>을 떠올리게 하는데, 누구든 영화 같은 삶과 삶 같은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감독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어디든지 다니는 건장한 감독의 뒷모습이 떠오르네요.
6.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키아로스타미, 1987)
키아로스타미의 출세작이자 진귀한 예술작품입니다. 어린 친구와 어른 모두가 바쁜 이란의 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사건을 흡입력 있는 서사로 풀어냅니다. 감독은 누구도 탓하지 않고 그저 이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마을을 종횡무진하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한편으론 슬프기도 합니다.
5.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미카엘 하네케,1994)
하네케의 숨겨진 걸작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20세기에 만들어진 하네케 영화 중 최고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7번째 대륙>, <베니의 비디오>와 함께 빙결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한 <우연의 연대기>는 미디어가 자신도 모르게 대중들로부터 은폐하는 사건들의 배후를 치밀하게 보여줍니다. 중간중간 나오는 뉴스 장면들을 주의 깊게 봤을 때 저는 전율했습니다. 도서관에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있다면, 영화관에는 하네케의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이 있습니다.
4. 동경 이야기(오즈 야스지로,1953)
제가 유일하게 가족들이랑 같이 보고 싶은 가족 영화입니다. 오즈 야스지로는 자칫하면 어떤 인물에 씌워질 안 좋은 프레임도 가뿐히 벗겨버리는 재주가 있습니다. 노부모를 모시기 꺼려하는 자식들의 모습이 어쩌면 나의 모습이 되진 않을까 괜히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작고한 어머니 옆에서 한 방향으로 고개를 숙인 자식들의 모습입니다. 그때 들리는 종소리, 잊지 못합니다.
3. 태어나기는 했지만(오즈 야스지로,1932)
맥주 먹으면서 보다 펑펑 울었습니다. 누구보다 강해보였던 아버지가 상사 앞에서 굽신거릴 때 두 아들한테 감정이입이 됐습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항상 보고나면 꼭 한 장면이 스틸 컷처럼 뇌리에 박힙니다. 두 아들의 자는 모습을 보며 웃지만, 한편으론 씁쓸해하는 부모의 모습에 괜히 눈물이 나오더군요. 어린 시절에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2. 노스탤지아(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3)
과장하면, 저는 <노스탤지아>로부터 영화적으로 세례받았습니다. 촛불을 오랜 시간 붙들고 기꺼이 도착지점까지 가고야 마는 인간의 집념에 감탄했습니다. 불길에 타는 제 몸으로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앞장서서 가는 사람과, 자기가 가는 곳마다 불어닥치던 작은 바람에 꺼지고 마는 초라한 불씨를 되살려내는 인물에게서 어떠한 경건함을 느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이런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요.
1. 클로즈 업(압바스 키아로스타미, 1990)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 엄청난 기대감을 갖게 해준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의 진가를 느꼈거든요. 아름다워 보이는 꽃에는 그냥 손이 가는 것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인생에 잠시 몸을 던진 사브지안을 영화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따뜻하게 안아준 그의 품격에 감탄했습니다. 이런 영화를 만들겠다는 다짐은 키아로스타미만이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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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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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은 고수처럼 잡아도 아직 햇병아리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촛불 롱테이크는 역사에 남을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71개의 단편이 흥미롭네요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은 초반에 살짝 지루하실 수도 있지만, 뉴스 장면부터 푹 빠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