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그레이 (1963) 신상옥 감독의 코메디 걸작
신상옥 감독이 창작의 절정기에 만든 걸작 코메디 영화다.
신상옥 감독은 1970년대 흐트러져서 여죄수 407호같은 심하게 말하면 삼류 에로영화같은 영화도 만들었지만, 그것은 시대상황도 고려해야 하는 문제다.
물론 한국영화사상 최고걸작 코메디는 1956년작 청춘쌍곡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1960년대 만든 일련의 코메디들은 우리나라 코메디 영화의 수준을 한단계 올렸다고 할 정도로 걸작들이다. 신상옥 감독 코메디영화 본질은 무엇일까? 어디까지나 당시 사회상황이나 계층에 철저하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에서 원작소설은 그냥 하숙을 놓는 홀어머니와 사랑방 손님에 대한 이야기다. 나머지는 진공상태다. 하지만 신상옥 감독은 여기에다가 기독교도 할머니, 봉건적 구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의 행복을 고민할 정도는 되는 세대의 어머니, 여기 대비되는 먹고 싶으면 먹고 섹X하고 싶으면 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가정부 이야기를 집어넣어서 당시 사회를 반영하는 깊은 이야기로 만들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늘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연기하던 김승호는 이 영화에서 그것을 비튼다. 대학교수 김승호는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난 상태다. 물론 김승호는 거짓말울 못하는 사람이라서 늘 위태위태하다. 김승호의 상징은 그의 가부장적인 위치를 상징하는 콧수염이다. 이 영화 초반에 정부 역할을 하는 최은희가 "요게 뭐야"하면서 그 콧수염을 가위로 잘라 버린다. 김승호는 가부장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늘 남에게 이용당하거나 혹은 남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한다. 이 영화는, 변화하여가는 가부장의 위치를 반영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김승호의 정부 역할을 하는 최은희는 음지에 숨어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당당하게 본부인 앞에 나가 따지고 활발한 사회생활을 한다. 빠걸이지만 대학을 중퇴한 인텔리도 나온다. 그녀는 남자를 어떻게 붙잡고 유혹할까 하는 것이 고민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이 고민이다. 이것 또한 당시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었을까?
김승호의 아내는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대모다. 그런데 어설픈 대모다. 남편의 바람을 하소연하는 황정순에게 당신이 화려하게 꾸몄으면 남편이 바람이 났겠냐고 여자들도 자기 관리를 잘 해야한다고 매섭게 꾸짖는다.
그런데 막상 자기 남편이 바람이 났다. 창피해서 못살겠다고 자살소동을 벌인다.
이 영화에서 막후 조종자가 바로 아들 신영균이다. 체육대에 다니는 대학생 신영균은 아버지의 바람을 목격하고 이를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한다. 그대신 아버지에게 최은희와 결혼하겠다고 연기를 한다. 아버지는 혼비백산하여 그 여자는 안된다면서 극구 말린다. 당장 최은희를 찾아가서 관계를 끊자고 하고, 아들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애걸한다. 신영균은 최은희에게 달라붙어있던 기둥서방을 두들겨 패서 쫓아버리고 최은희에게 새출발을 하라고 한다. 최은희는 새출발을 할 생각은 있었지만 여러가지 장애물들이 있어 망설이고 있었는데, 신영균이 이를 정리해버리자 홀가분하게 부산으로 떠난다. 이 영화에서 구세대는 좀 어설프고 실수연발이지만 신영균으로 대표되는 신세대는 현명하고 구세대를 이해하고 포용한다. 이들이 산업화세대다.
신상옥 감독의 이 코메디는 당대 사람들에게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영화 자체만 보아도, 매우 웃기는 완성도 높은 코메디다. 늘 하던 가부장 연기를 패러디해서 구수한 목소리로 코메디 연기를 하는 김승호는 여전히 독보적인 연기를 하고, 늘 매섭고 날카로운 연기를 하던 한윤진 또한 이를 비튼 허술한 페미니스트 역을 한다. 매서운 표정으로 말을 하는데, 알고보니 허당이다.
늘 단아한 역을 하던 최은희는 이 영화에서, 쌍욕을 입에 달고 살며 시간만 나면 화투를 탁 탁 치는 여자로 나왔다. 그런데 자기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기도 하다. 신상옥은 이 모두를 조율하여 완성도 높은 코메디로 구축해낸다.
우리 영화 황금기에 대가들이 모여 프로페셔널한 협업으로 만들어낸 걸작이다.
P.S. 1960년대 서울 토착세력이 어떻게 몰락하고 그 자리를 신세대가 차지해갔는지에 대한 코메디는 서울의 지붕 밑이라는 코매디다. 김승호, 허장강, 김희갑이라는 세 대가급 배우들의 툭 치고 빠지는 하모니가 놀랍다. 캐릭터 개성을 잘 살려 연기한다 정도가 아니라 아주 뚜렷이 부각시켜 관객들에게 던지는 수준이다. 이 분야 금자탑은 1956년 청춘쌍곡선이다.
시대 생각하면 대단한 작품 같네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