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 of triumph (1948) - 엄청난 걸작 소설의 범작 영화화
원작 소설이 엄청난 걸작 로맨스소설이다. 개선문의 영화화를 굉장히 기다려온 입장에서 이 영화는 굉장히 반가웠다.
1938년 유럽은 나찌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오직 하나 남은 것은 프랑스. 파리에는 유럽 각지에서 온 망명객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프랑스도 나찌 지배 하에 놓이는 것은 시간문제다. 가라앉아가는 배 안에서 이리저리 발버둥치는 쥐떼들처럼, 프랑스 바깥으로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
절망 겸 공포 겸 불안 겸 해서 사람들은 반쯤 미친 상태로 쾌락에 탐닉하고 자학하고 자기를 잊으려 한다. 죽음에 대해 공포에 질리다 못해 이제 무감각해졌다.
개선문은 이런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다가 비극적 결말을 맞는 이야기다. 원작자가 이런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굉장히 실감나고 당시 상황과 사람들을 너무 생생하게 그렸다.
본명인지도 모를 의사 라빅은 독일에서 도망쳐 온 유태인이다. 독일에서는 저명한 의사였지만, 프랑스에서는 의사 자격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프랑스 의사 대신 도둑수술을 해주면서 먹고 산다. 돈? 저축해서 뭐하나. 버는 족족 매춘부에게 쓰고 도박에 쓰고 술을 마셔서 쓰고 한다.
그에겐 하나의 집착이 있다. 그의 행방을 추적하려 나찌는 아내를 잡아다가 고문을 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버티다가 죽고 만다. 아내를 죽인 나찌 장교에게 복수하는 것이 바로 그의 집착이다. 공포스런 상황에 지쳐 그는 무감각해졌다. 남이 고통을 당하는 것도 자기가 고통을 당하는 것도 무감각하다.
그런데 어느 비오는 날 그는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 하는 초라한 여자를 구해주게 된다.
라빅을 연기하기에는 남자배우 찰스 보이어가 너무 중저음에 마초적인 분위기가 난다. 그런데 내가 라빅을 만나본 적 없으니, 그가 실제 마초적인 남자였을 수도 있겠다.
라빅은 인텔리에 지적이고 신랄하고 굉장히 섬세한 사람이다. 이 영화에서 찰스 보이어는 라빅을 무슨 느와르 필름 주인공처럼 연기한다.
라빅이 구해준 집시 여자 조안을 연기하는 사람은 잉그릿드 버그만이다. 물론 엄청난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미지가 너무 맞지 않는다.
너무나 화려하고 요염해서 남자들이 저절로 끌려드는 집시여자 - 잉그릿드 버그만이 이런 스타일은 아니다. 알다시피 집시들은 유태인들보다 더 잔인하게 나찌에게 박해당했다. 조안은 공포에 질려서 애정결핍증같은 것에 걸려서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라면 다 받아들인다. 조안을 처음에는 사랑해서 다가갔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들은 이런 비정상적인 조안의 집착증에 질려서 폭력을 휘두르다가 차버리고 떠난다. 절망한 조안이 다리에서 자살하려는 것을 구해준 것이 라빅인 것이다.
원작소설에 보면 이 장면이 너무 섬세하고 서정적으로 그려져있어 영화화가 불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영화에서 라빅과 조안이 만나고 해어지는 과정이 너무 기계적으로 그려진다. 심하게 말하면, 줄거리만 따라가는 다이제스트 식이다.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둘의 사랑만 놓고보면 순애보다. 그런데 상황이 상황이다. 조안은 라빅과 살다가 잠시 뒤에 다른 남자와 떠난다. 라빅은 붙잡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조안은 잠시 뒤에 돌아온다. 그럼 라빅은 탓하지도 않는다. 그저 잠시 동안만 허락된 조용한 순간을 즐길 뿐이다. 둘의 뒤에는 늘 다가오는 죽음이 느껴진다.
사실 이 절박함이 영화에서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을 표현하려는 의욕도 영화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원작이 아주 좋잖아? 이것을 헐리우드 고전영화 스타일로 영화화해야지......" 이 정도다. 찰스 보이어, 잉그릿 버그만, 찰스 로튼같은 대배우들을 기용해서 한다면 영화 퀄리티는 자동 보장이다......하는 식으로.
하지만 시대적 상황이나 등장인물들이 너무 엄청난 사람들이다.
둘의 결말은 비극으로 끝날 것임을 관객들은 짐작할 수 있다. 그것 외에 다른 무슨 결말이 있겠는가?
조안이 죽는 장면은 정말 명장면인데, 영화는 이것을 아주 밋밋하게 헐리우드 스타일로 속사포처럼 흘려버린다. 조안이,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은 오직 라빅뿐이고 다른 남자들은 너무 불안하고 무서워서 그랬다 라고 고백하고 라빅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서서히 조안이 죽어가는 곁을 지킨다.
나찌가 이미 프랑스를 점령했으니 조안이나 라빅이나 죽는 것은 시간문제인데 조안이 총기사고로 죽어버린 것이다.
조안이 죽은 다음, 라빅은 그녀에 대한 사랑에 무감각해진다. 조안이 죽을 때 라빅은 목놓아 울지만 다시 일어서자 죽음이 기다리는 상황이 그를 짓누른다. 잃어버린 사랑을 기억하고 애달파하는 것은 그에게 사치다. 집으로 돌아오자 나찌가 기다리고 있다. 자기가 늘 도와줬던 프랑스 의사 간호사가 고발한 것이다.
아무리 친한 척 했어도 속으로는 라빅을 경멸하고 차별했던 것이다. 라빅도 수용소로 죽으러 끌려간다. 그가 탄 차는 개선문을 지나간다. 영광, 승리같은 것을 상징하던 개선문은 패배와 비인간성, 잔인함, 비열함의 상징이 된다. 라빅은 이미 조안에 대한 사랑에도 자기 죽음에도 무감각해진다. 그는 공포도 절망도 없이 나무토막처럼 무의미하게 죽으러 끌려간다. 이 영화의 진짜 비극은 바로 이것이다. 자기 죽음에 공포에 질리는 것, 살고자 하는 발버둥을 치는 것 - 인간이 최소한 자기에게 가져야 할 존엄함이다. 그런데 이것도 허용되지 않는 시대다.
어찌 보면, 너무 조용하고 단정하고 우아한 헐리우드 고전영화 양식이 (레베카같은) 이 영화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1948년이면 소설 배경인 1938년으로부터 멀지도 않은 시대니까 그 배경을 몰라서 이런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론 브란도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식의 영화가 어울렸을 터인데, 랜덤 하베스트 식의 영화가 되었다.
원작소설과 너무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영화로만 보아도 줄거리만 다이제스트 식으로 보여주는 통에 별 감동이 없을 것이다.
단, 아름다운 잉그릿 버그만의 명연기는 엄청나다.
어릴 때 책장에 꽂힌 책 제목만으로 기억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