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트] 간략후기
레오 까락스 감독의 새 영화 <아네트>를 보았습니다.
과작으로 잘 알려진 레오 까락스 감독이 <홀리 모터스> 이후 9년만에 내놓은 이 영화는 뜻밖에도 뮤지컬입니다.
거기다 감독의 첫 영어 영화인 만큼 대중성과 무난히 타협했겠거니 싶지만, 뮤지컬 넘버가 흘러나오는 와중에도
19금 장면(다만 국내에선 15세 관람가입니다)을 연출하듯 인간 내면의 반짝임과 어둠을 악착같이 들여다 봅니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노래 선율에 실어, 영화는 일시적인 쇼의 감흥이 아닌 소용돌이치는 인간의 감정을 전합니다.
잘 나가는 코미디언 헨리(아담 드라이버)와 잘 나가는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은 연인 사이입니다.
신경질적인 코드로 아슬아슬한 웃음을 자아내는 헨리와 죽음을 벗삼은 가련한 디바의 이미지로 사랑받는 안은
각기 다른 예술혼을 따라 강렬하게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며 약혼을 맺습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인기인들의 결합으로 두 사람은 줄곧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에 딸 아네트가 생기면서 사랑은 더욱 무르익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진 모르겠지만 둘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기고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아네트에게 범상치 않은 예술적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네트>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올 영화이지만 적어도 스토리에 있어서는 새롭지 않습니다.
열렬히 사랑했던 남녀가 현실과 부딪히면서 관계의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는 익히 보아온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법인데, 영화는 이 이야기가 일종의 '무대에 올려진 이야기'임을 부각시킵니다.
마치 암전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오프닝의 (심지어 공연 중 숨조차 쉬지 말라는) 안내 멘트부터 해서
시작하자마자 레오 까락스 감독 본인(+실제 딸)과 극중 역할이 아닌 마리옹 꼬띠아르와 아담 드라이버가 등장해서는
음악을 빌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며 스크린 밖 관객들을 이야기가 펼쳐질 공간으로 이끕니다.
"시작해도 될까?"라는 가사와 함께 배우들과 크루들이 선보일 무대가 될 것임을 선언한 끝에,
주어진 복장을 입고 무대에 오른 두 배우를 따라 헨리와 안의 비극적 사랑이야기가 '공연'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 무대 위에는 화려하고 정교한 쇼가 아니라 내밀하고 날카로운 감정들이 노래 선율에 실려 몸집을 부풀려 나갑니다.
사랑이라는 정서적 화학작용으로 만났지만 극명하게 다른 지향하는 두 사람은 예정된 파국으로 향해 가지만,
영화는 그렇게 감정이 과격하게 맞부딪치는 순간들마저도 노래로 채워 나갑니다.
신경질적으로 청중을 제압하며 만족감을 느끼는 헨리와 그와 반대로 온화하고도 풍요로운 목소리로 청중을 끌어안는 안.
관계에서 이런 대비는 때로 균열을 부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에서 이런 대비는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파괴마저 감미로운 사랑의 속성을 이야기하고자 감독은 뮤지컬의 형식을 택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초반 헨리는 무대에 올라 청중에게 자신은 심연을 들여다 보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심연은 한없이 대상을 끌어당기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들여다 보는 순간 그대로 잠겨들 것임을 알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다짐이 무색하게, 이후 헨리는 안과의 사랑을 동기로 심연 속으로 풍덩 빠져들어 갑니다.
딸 아네트가 생긴 후에 사랑은 모진 집착이 되어 그를 무너뜨리지만, 헨리는 아마도 그 순간마저 몰입했을 것입니다.
'안'과 '마리오네트'를 합친 듯한 '아네트'라는 딸의 이름처럼 딸은 그의 꼭두각시처럼 '기능'했지만,
헨리는 그 마저도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그러므로 노래처럼 찬미했을테죠.
영화의 중심에는 내내 사랑이라는 가면 뒤에 그늘 되어 숨은 집착과 파괴의 비극이 자리하고 있지만,
영화는 그 비극을 애써 부인하며 사랑의 멜로디를 읊는 감정을 따라 우스꽝스러운 과장과 넘실대는 환상 사이를 오갑니다.
어쩌면 무너지고 생채기 나는 순간에도 노래처럼 우리를 휘감고 도는, 가혹하도록 아름다운 사랑의 본질일 것입니다.
감정의 밑바닥을 긁다가도 드높이 비상하기를 거듭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빼어난 스토리텔러입니다.
작품마다 대단한 연기를 보여주는 아담 드라이버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에서 강렬한 연기를 본지 얼마되지 않아
이 영화에서 또 한번 카리스마 넘치는 코미디언과 파괴적인 사랑의 소용돌이에 뛰어드는 인간을 표현하며 영화를 장악합니다.
공연 장면에서는 마치 실제상황과 연기의 경계를 넘나드는 듯 자유분방한 연기를 펼쳐 보이다,
뮤지컬 장면에서는 롤러코스터 같은 호흡으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지배력을 보여줍니다.
마리옹 꼬띠아르는 이와 극명히 대비되게 한껏 고양되는 우아함으로 갈수록 휘발되어 가는 낭만과 사랑의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파국으로 치달을 걸 알면서도 이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을 지켜볼 수 밖에 없게 하는, 생명력을 영화에 부여하죠.
음악이 그러하듯, 이 두 배우의 호흡 또한 지극히 다른 힘과 색깔로 부딪치는 광경이 하모니가 되어 영화를 채웁니다.
'빅뱅이론'으로 잘 알려진 사이먼 헬버그 역시 연주자 역할로 나와 많지 않은 비중 속에서 개성 있는 정극 연기를 선보입니다.
레오 까락스 감독은 <아네트>를 통해 뮤지컬이라는 장르적 장치를 역시나 본인만의 방식으로 활용했습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빠져들게 하면서도 동시에 경계하게 하는 것, 영원 같은 몰입이자 찰나 같은 쇼일 수 있다는
사랑의 성질을 느끼게 하는 도구로서 뮤지컬은 파워풀하게 활용되었고, 이는 분명 취향을 타는 매력일 것 같습니다.
심연에 기꺼이 뛰어들듯 소용돌이치는 무대 속으로 흔쾌히 뛰어들든, 저 기이한 에너지가 일으키는
아름답고도 파괴적인 파장을 멀찌감치서 지켜보든 흥미로운 영화가 될 것입니다.
추천인 23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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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드라이버 연기가 대단했어요 역겹게 느껴지는 코미디언 연기를 어떻게 그렇게 해내는지!
극장에서 볼 때는 좀 읭 스럽고 지루하게 느껴잔 부분이 있었는데, 후반부부터 엔딩을 보니 확 감상도 달라지고 ost를 다음날 들어보니 더 매력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신기하고 기묘한 매력이 있어요 ㅋㅋㅋ
리뷰보니 한번 더 보고싶어지네요 ㅜㅜ
영화 정말 좋았습니다! 👍
였군요. 한 번 더 보고 싶어지네요.
근데 어떻게 하면 글을 이렇게 잘 쓸수 있는건가요...
글 너무 잘 쓰시네요....감탄하면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