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 벗어날 탈 : 스포 없는 후기 및 스포 포함된 주관적 해석입니다.
후기 (스포 x)>
이번 부국제에서 파비안 다음으로 두번째로 인상깊게 본 작품입니다. 영화의 시놉시스만 읽어봐도 난해한 인상을 주는 데다가 영화 자체도 다 보고나면 답보단 궁금증들이 먼저 떠오르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짧은 러닝타임 동안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들을 통하여 무시무시한 몰입감을 만들어내는데다가, 다 보신 이후로는 쉬이 구체화되지 않는 개개인만의 감상이 분명 생겨나면서 왠지 개운한 느낌이 드실 겁니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서 (그것도 독립영화에서!) 이토록 철학적이고 종교적으로 깊이있으면서도 흥미롭고 창의적인 표현기법까지 갖춘 영화가 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고스트 스토리>나 <토리노의 말>과 같은 상징적인 기표들을 해석하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강추합니다!!
*아래부터는 제가 왓챠개인평으로도 올린 영화에 대한 제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GV에서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벗어날 탈>을 감상하는 데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으니, 한 명의 관객의 감상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관적 해석 (스포 o)>
모든 구도의 길에서는 진리를 찾아헤메는 '구도자'와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진리', 그리고 구도자가 자신의 순례길에서 맞닥뜨리는 '진리'에 대한 힌트들, '진리의 그림자들'이 존재한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 구도의 길이 제시된다. 용철은 자신의 필연적인 죽음 이전에 하나의 '진리'를 포착하기 위한 순례길에 오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무'를 무기로서 사용한다. 그는 자신이 학습한 글귀들과 자신 주변의 물체들을 '무화'시킨다. 영화의 첫 나레이션처럼 용철은 관찰자의 편향된 시선이 진리로의 도달을 방해한다고 믿으며, 그에 따라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번뇌들을 지워나간다.
지은 또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다. 그녀는 죽음을 향해 움직이는 동적인 이미지들에 대한 공포감을 품어 시간의 진행을 정지시킨, 죽음으로부터 유예시킨 이미지들만을 그려왔다. 이제 그녀는 그 공포감을 극복하여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오랜 기억 속에 품었던 '해변의 사내'를 죽음에서 건져올리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한다. 처음에는 그녀도 지워나감으로써 이미지를 만드는 방법, 즉 용철과 비슷한 구도의 길을 택하고자 했으나 이내 이것이 버거운 길임을 깨달아버린다.
따라서 그녀가 택한 길은 생도 죽음도 없으나 끊임없이 움직이는 윤회의 이미지를 해답 삼아, '해변의 사내'를 죽음에서 건져올리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반면 용철이 일시적이고 편향된 '물질' 혹은 '육신'이 주는 고뇌를 지워나가며 구도하는 방식은, 오랫동안 불교에서 강조되어온 윤회의 고리를 끊고 열반에 오르고자 하는 구도의 방식과 상통한다. 여기에서 둘 사이의 차이점이 발생한다.
어쩌면 용철이 지은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유령을 극도로 두려워했던 게 이와 관련있을지도 모른다. 지은의 애니메이션처럼 다리를 벌려 자신을 윤회의 반열에 올려 생으로 순환시키려는 유령의 이미지는, 육신의 번뇌가 재시작되는 것을 경계한 용철에게는 마귀와도 다름없었을 것이다. 용철이 추구하고자 하는 진리는 덧없이 변화하며 순환하는 윤회에 영향받는 것이 아닌 절대적이고 고정된 속성의 것이었다. 반면에 지은은 자신이 그동안 추구해온 '사진'과도 같이 멈춰있는 이미지들이 사물의 본질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한계를 내심 깨닫고 있었기에, 그녀가 추구하는 진리는 '물체는 지우고 행위만 남긴' 동적이고 움직이는 속성의 것이었다. 결국 구도의 끝에서 용철과 지은은 개별적으로 추구한 진리를 직접 목도하게 된다. 용철은 관찰자 없이도 포착되는 진리(듣는 이 없이 들리는 유리잔의 깨지는 소리)를, 지은은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움직이는 진리(흙탕물에 비치는 건물의 형상)을 각각 발견해낸다.
이렇게 구도에 있어서 진리관에서부터 그 종착지까지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었지만, 이 둘의 구도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다. '검은 옷의 남자'로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그 공통분모이다. 용철의 관찰에 따르면 그 남자는 화염으로 표현되는 '무'를 직접적으로 체험한 인물이며, 지은의 관찰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강물을 바라보거나 빙빙 도는 춤을 추는 등 자신만의 구도를 이어나가는 인물이다.
'검은 옷의 남자'가 자신만의 구도를 통해 무엇을 찾고자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가 강물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용철이 부처들이 태어나는 곳이라 일컬은 '동산수산행'의 이미지가 연상되고, 이는 지은이 발견한 '흙탕물 속의 건물'의 형상과도 겹치게 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검은 옷의 남자'가 빗속에서 빙빙 돌며 추는 춤은 지은의 애니메이션이 유래된 윤회의 형상을 연상시키면서도, 이는 빗물에 흠뻑 젖은 채로 명상에서 깨어나는 용철의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검은 옷의 남자'는 용철과 지은의 구도를 이어주는 매개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용철과 지은의 분신이다. 그리고 '검은 옷의 남자'에 의해 연결된 이후 두 남녀는 진정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진리관을 가진 유령으로서가 아니며, 본질이 불분명한 사진 속 '해변의 사내'로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진리관을 가짐에도, 마치 허울을 벗어던진 아사달과 아사녀처럼, 구도에 대한 편향된 시선을 벗어던짐으로써 병존이 가능해진 두 명의 동등한 구도자로서이다.
불일불이(不一不二). 우리는 서로 같지 않으나, 서로 다르지도 않다. 두 남녀의 구도의 끝은 끝이면서도, 끝이 아니다. 각자의 개인적인 진리가 곧 우주적인 진리이다.
* 남자(용철)의 과업 : 육의 번뇌를 무화하고, 진리를 구도하는 것
* 남자가 구도 중에 발견한 것
1) 없다(무)란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 인간이 놓인 형상
2) 수많은 부처들이 탄생하는 곳은 '물 위를 건너는 동쪽의 산(동산수산행)'이다.
3) 연기가 나는 자신의 방에서 뛰쳐나간 뒤, 화재로 부상당한 한 남자가 복도로 실려나가는 걸 목격한다.
4) 빨간 옷과 검은 치마의 얼굴없는 여성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5) 방 안에는 지중해를 표현하는 그림이 그려진 냉장고 자석이 있다.
6) 명상에서 깨어난 자신은 땀이 아니라 물에 젖어있었다.
7) 컵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곳에는 그것을 들을 내 자신이 없었다.
* 여자(지우)의 과업 : 죽음에 대한 유예를 멈추고, 동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 그리고 소멸에 이른 '해변의 남자'를 다시 생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
* 여자가 구도 중에 발견한 것
1) 사진은 '지금'인 것마냥 존재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것이 아니다.
2) 탄생도 소멸도 없이 순환하는 이미지라면, 죽음에서 자유로운 동적인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다.
3) '해변의 남자'를 죽음에서 구하려면 다시 태어나게 하면 된다. 그것은 여자의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할 수 있다.
4) '검은 남자'가 자신의 사진을 불씨 속에서 건져올렸다. 그는 강을 한없이 바라보거나 빗속에서 빙빙 돌며 춤을 춘다.
5) 처음에는 '검은 남자'가 '해변의 남자'일 거라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는 화재로 죽은 줄만 알았던 남자였다.
6) 가볍게 봐야한다. 물체는 지우고 행위만 남긴다.
7) 내가 이동하면 물에 비친 건물도 이동하고, 내가 멈추면 물에 비친 건물도 멈춘다.
8) 지워나가면서 이미지를 생성하는 과정은, 새로 만들어나가는 것만큼이나 버거운 과정이다.
추천인 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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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스토리와 토리노의말 두 영화 다 제가 마음이 어수선할때
그냥 틀어놓기만해도 좋은 영화인데 영화평를 읽으니 이영화는 꼭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