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그넌트] 간략후기
제임스 완 감독의 신작 호러 영화 <말리그넌트>를 보았습니다.
21세기의 손 꼽히는 두 호러 프랜차이즈인 '쏘우'와 '컨저링'을 낳은 제임스 완 감독이기에, 오랜만에 그가 들고 온 호러 신작에 대해
'쏘우'와 '컨저링' 그 어디쯤에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많았겠습니다만, 이 영화는 그 기대를 아득히 넘어섭니다.
호러에서 시작해 블록버스터까지, 다양한 장르와 규모의 영화들을 오가며 쌓은 연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임스 완 감독은 그간 쌓아온 필모그래피의 단순한 총합이 아닌, 아예 새로운 결과물로 관객을 놀라게 합니다.
이 놀라움을 즐겁게 누리느냐, 당황스럽게 맞닥뜨리느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만족도는 극명하게 갈릴 것입니다.
매디슨(애나벨 월리스)은 폭력적인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끔찍한 환영을 보기 시작합니다.
어떤 미지의 살인마가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을 살해하는 광경을 목격하는데, 환영에서 깨어나면 그 살인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이죠.
동생 시드니(매디 해슨)의 보살핌 속에서도 환영은 계속 되고 그만큼 살인이 연이어 발생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가운데,
매디슨은 사건을 수사 중인 형사들에게 자신이 살인마에 대해 아는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살인마의 이름이 '가브리엘'이고, 그가 바로 매디슨의 어린 시절 상상 속 친구라는 것이죠.
만일 매디슨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브리엘은 왜 매디슨이 어른이 되고 한참이 지나서 다시 나타나 살인을 저지르는 걸까요.
아니, 상상의 존재가 현실에서 살인을 저지른다는 게 가능은 한 걸까요.
<말리그넌트>는 이 정도의 시놉시스가 공개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예측하기 힘든 이야기로 뻗어나갑니다.
제임스 완은 여전히 젊은 나이에 비해 입지전적인 성과를 거두어 온 감독입니다.
평단과 대중을 놀라게 함은 물론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쏘우'와 '컨저링' 프랜차이즈를 배출한 장본인인데다,
블록버스터로 진출해서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 사상 최고 흥행작을 만들고 <아쿠아맨>으로 방황하던 DC 유니버스를 일으켜세웠죠.
그리고 <아쿠아맨 2>로 향하기 전에 이 호러 영화를 내놓았으니, 대중은 아무래도 감독이 오랜만에 본령으로 돌아왔거나
대작을 연이어 찍기 전에 작은 규모의 장르물로 쉬어가겠거니 생각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고요.
그러나 제임스 완 감독은 <말리그넌트>의 포지션을 '잘 하는 것'이나 '쉬어가는 순서'가 아닌, 본격적인 '실험'으로 설정합니다.
하드고어 스릴러와 심령 호러, 블록버스터 등 개성이 뚜렷한 장르들을 넘나들며 성공작을 배출해 온 그는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좀체 예측할 수 없는 이 이야기 안에 각 장르에서 터득한 그 노하우들을 절묘하게 버무려 넣습니다.
빨아들일 듯 휘몰아치는 서스펜스, 과감함과 절제 사이를 줄타기 하는 폭력 묘사, 감각을 곤두세우는 듯 역동적인 연출은
아찔한 피칠갑과 의뭉스런 사건들, 혼란스런 심리전과 눈을 의심케 하는 장면들을 줄이어 등장시킵니다.
영화는 처음에 예상한 이야기를 가뿐히 비웃는 전개로 나아가는데, 이게 대체 말이 되는지 가능한 이야기인지 싶다가도
영화가 초반부터 정성들여 깔아놓은 떡밥을 상기하면 당혹스러움은 곧 놀라움으로 변합니다.
제임스 완 감독의 출세작인 <쏘우>가 유명한 큰 이유가 파격적인 스토리텔링이었다는 걸 새삼 되새기게 됩니다.
저예산 스릴러에서 시작해 텐트폴 블록버스터로까지 경력을 확장시킨 제임스 완 감독이 이 영화로 시도하는 실험은 '장르의 파괴'입니다.
(되짚어 보면 외관상 지극한 고전 호러인 <컨저링> 시리즈 또한 액션영화 뺨치는 연출과 뜻밖의 휴머니즘을 결합한 '별종 장르'이기도 했습니다.)
비범한 상상력의 씨앗이 틔우는 싹에 대해 어디를 어떻게 비추느냐에 따라 섬뜩한 호러가 될 수도,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사이코 스릴러가 될 수도,
도발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액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시각각 바뀌는 페이스를 통해 입증하고자 합니다.
<말리그넌트>의 이처럼 널뛰는 페이스는 장르적 일관성을 선호하는 관객에게 상당히 불만스러운 영화가 될 수 있겠지만,
장르의 한계를 넘보며 새로움을 탐험해 보려는 관객에게는 좀 더 맛보고 싶은 감질나는 즐길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악령과 인간, 살인마와 그에 맞서는 자 등 호러 장르의 컨벤션을 공들인 떡밥을 마탕으로 기세 좋게 파괴하는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제임스 완 감독은 호러/스릴러 장르를 기반으로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에 계속 매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 다녀온 것도, '아쿠아맨' 시리즈를 한창 만들고 있는 것 또한 그런 작업의 일환이 아닐까 싶고요.
'쏘우' 때는 예산의 한계를 이야기의 재간으로 돌파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그때보다 주어진 것이 훨씬 많은 현재의 제임스 완은
꼭꼭 감추거나 비트는 이야기의 트릭만 고집하지 않아도 전형성을 부수고 관객을 놀라게 할 방법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상업 영화라는 제도 안에서 그 도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말리그넌트>가 그 가능성을 기대케 합니다.
추천인 9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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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잘 봤습니다.
추석 가족영화는 아니지만..
좀 더 영화 마니아 티깃으로 홍보했으면 입소문 좀 나지않았을까 생각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