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큐 (1989)
테시하가라 히로시 감독의 역작 리큐다. 글자 그대로 일본 다도의 창조자라는 리큐의 말년, 특히 토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관계를 그린 것이다.
그 자신 소게츠류 3대 계승자로서 꽃꽂이의 명인이기도 한 히로시 감독만큼 리큐에 대해 그려내기 적합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리큐가 어떻게 그의 다도를 발전시켜나갔느냐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리큐에 반대되는 사람이 토요토미 히데요시다. 싸구려 극장에서 만담 공연하는데 일해주고, 공연이 끝나면 다 같이 앉아서 밥 먹으며 떠들고 웃고 이런 촐랑이 소년이 장군이 되고 일본을 통일하였다. 나중에 만인을 지배하는 위압적인 지배자가 된 이후에도, 그는 걷는 법 없이 촐싹촐싹 달린다.
낄낄 웃고 어쩔 때는 소탈하게 농담도 걸고 하다가 느닷없이 돌변해서 잔혹한 지배자의 모습을 보인다. 히데요시는 강인한 생명력과 활력의 화신이다.
리큐와 히데요시 간 갈등이 이 영화의 주제다.
일개 다도선생과 절대권력자가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리큐는 일개 다도선생 정도가 아니라 일본 전체의 숭배를 받는 정신적 지도자다.
사람들은 리큐의 목상을 만들어서, 히데요시의 사자가 드나드는 문 위에다가 갖다놓는다. 히데요시를 리큐 발밑에다가 놓은 것이다.
아무리 절대권력자라지만 히데요시도 싸구려 만담 예술가 집안 출신이다. 리큐를 존경할 줄 안다. 하지만 엄숙하고 형식적이기만 한 리큐의 다도에 반감을 갖는다.
그는 자기 차실을 황금으로 온통 치장한 황금다실을 만들기도 하고, 동백꽃이 활짝 피면 이를 보며 즐거워한다.
리큐는 소박 단순이 다도의 본질이라면서, 이를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분의 것을 깎아내고 깎아내고 하는 힘겹고 인위적인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소박 단순 그 자체다. 히데요시와 리큐가 영화 마지막에 만나는 장면도 그렇다. 히데요시는 오는 길에 꺾어왔다면서 벚꽃이 잔뜩 핀 가지를 내민다.
리큐는 이 꽃뜰을 다 뜯어서 물 위에 띄운다. 이렇게 함으로써 찰나의 순간에 존재하는 꽃의 아름다움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찰나에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대접해야 한다 하는 철학이 여기에서 나온다. 꽃을 보면 그 활짝 피어있음을 아름답게 보고, 사람을 만나면 그냥 즐겁게 웃고 떠드는 히데요시에게는 멀게만 느껴진다. 처음에는 존경하다가 나중에는 반감을 가지고 적대시하게 된다. 이것은 히데요시와 리큐 간 예술적 갈등이다.
이 영화 내내 둘 간 갈등이 보여진다. 히데요시는 리큐에게 자신의 절대권력화를 도우라고 명령한다. 황금차실을 만들고 천황과 다도모임을 갖도록 하고 자신을 대신해 부하장군들에게 차를 대접하고 등등. 리큐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는 히데요시를 돕지만 동시에 그의 천박함에 대해 비난하기도 한다.
히데요시는 검은색 찻잔을 싫어하고 화려한 찻잔과 황금장식을 좋아하는데, 리큐는 검은색이야말로 아름다운 색이라고 하면서 히데요시를 얕잡아본다.
아래는 이를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빛나고 화려한 색을 가진 아래 찻잔은 점차 식어가면서 검은빛을 띄어간다.
저러다가 큰일 나겠다고 친구들이 달려와 뜯어말리지만 리큐는 자기 태도를 고치지 않는다.
그런데 잠깐. 평담함과 단순함이 다도의 본질이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 리큐의 철학은 평담함과 단순함을 내세우면서 사실은 가장 형식적인 엄숙주의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화려한 것을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가장 단순한 검은색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식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는 리큐가 정치 사회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이라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다.
히데요시는 결국 폭발한다.
히데요시와 리큐가 최후로 만나는 장면은 명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히데요시는 혼자서 리큐의 다실로 찾아간다. 방안에 둘만 앉는다.
히데요시: "이 사람아, 이 방에 우리 둘만 있고 둘 사이에 벽도 없는데 왜 그렇게 멀리 앉는가? 제발 가까이 좀 와보게."
리큐: 다가오지만 외면하고 앉는다.
히데요시: "날 비난해도 좋으니 침묵하지 말고 아무말이나 해보게. 무슨말을 해도 좋아."
리큐: (차갑게) "전 할 말이 없습니다."
히데요시는 필사적으로 리큐의 견고한 껍질을 깨버리고 그의 엄숙주의를 걷어내고 인간 리큐를 드러내게 하려고 노력한다. 둘 간 대화는 엄청 격렬하고 폭력적이다.
리큐는 결국 그의 속마음을 히데요시에게 말해버린다. 조선 침략은 멍청한 짓이고 히데요시는 괴물이 되었다고.
하데요시는 리큐에게 할복자살을 명하고, 리큐가 빌러오기를 기다린다.
사실 잘 만든 영화이기는 하지만, 테시하가라 히로시 감독이 아니었어도 만들 수 있었을 영화인 듯하다. 리큐와 히데요시 간 갈등에 대한 주제나 이야기 전개도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좋은 영화는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무언가 배우게 하는 그런것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너무 사람들의 예상 그대로였던 듯하다. 그가 만든 속편에 나오지만 리큐의 제자가 실은 그의 내연녀였다든지, 히데요시에게 대항했다가 처형당한 제자와의 일화 등 리큐에 대해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소재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런 장면들은 빼버리든지 아니면 사람들의 몰이해와 비난에 묵묵부답으로 그냥 좌선만 하고 있는 리큐를 보여준다든지 해서 영화를 틀에 박힌 리큐 전기처럼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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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