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디슈] 간략후기
김윤석, 조인성 배우 등이 출연하는 류승완 감독의 신작 <모가디슈>를 시사회로 미리 보았습니다.
1991년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함께 내전 중인 소말리아 모가디슈를 탈출했던 실화를 각색하여 만들어진 이 영화는
드라마틱한 실화에 편리하게 붙이기 쉬운 감동 코드나 과장된 연출의 유혹을 뿌리치고 제1의 미션인 '탈출'에만 집요하게 몰두합니다.
액션 연출이 빼어나기로 정평이 난 류승완 감독이지만 액션에 대한 야심보다는 실화의 재현에 대한 의지에 충실하며,
그 어떤 다른 생각도 품을 새 없이 오직 탈출만이 급선무였던 영화 속 인물들의 태도처럼 침착하고 정직한 질주를 보여줍니다.
그러니 액션 시퀀스의 개성도, 갈등과 이해 속에 생겨나는 감정의 함의도 무척 자연스럽게 관객을 매료시킵니다.
1991년 1월만 해도 대한민국은 유엔 가입국이 아니었습니다. 유엔 가입을 위해서는 가입국들의 표를 얻는 것이 절실했고,
당시 대한민국은 대륙 중 가장 많은 표를 확보할 수 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외교를 공격적으로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도 한신성 대사(김윤석)를 비롯한 여러 외교관들과 그 가족들이 파견되어 있던 중입니다.
안기부 소속이지만 해외 대사관 담당으로 일종의 '좌천'을 당한 강대진 참사관(조인성)이 마침 모가디슈를 찾고,
역시 모가디슈에 파견된 림용수 대사(허준호), 태준기 참사관(구교환) 등 북한 외교관들과의 신경전도 계속됩니다.
그러던 중 소말리아 정부에 반기를 든 반란군과 정부군이 충돌하면서 내전이 발발하고, 모가디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입니다.
정부에 불만을 가진 반란군은 정부 친화적인 해외 대사관들에게도 적대적으로 나오고 공격을 일삼기 시작한 것입니다.
통신과 전기는 끊기고 총알과 포탄은 빗발치는 가운데, 대사관 직원들과 가족들이 숨죽이며 힘겹게 버티고 있는 와중에
반란군들에게 대사관을 빼앗기고 쫓겨나오듯 피신길에 오른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남한 대사관을 찾아옵니다.
당시만 해도 엄혹했던 남북 관계, 남측과 북측 대사관 사람들은 전례 없는 상황에 당혹해 하지만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이내 오직 생존만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서 함께 살 방도를 찾아나서기 시작합니다.
류승완 감독은 전작인 <군함도>에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가공하며 실책을 범한 바 있습니다.
조심스럽고 정교하게 다루어져야 할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과 정서를 과하게 주입하면서 오히려 본질은 소모되고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인지, 이번 <모가디슈>는 생생한 생존극으로 완성하며 지난 실책을 만회합니다.
똑같이 탈출을 소재로 했고 심지어 <모가디슈>는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탈출이 이루어졌지만,
이미 실화를 재현하기만 해도 충분히 극적인 이야기에 과장된 상상력과 정서를 성급하게 불어넣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가치판단을 최소화하고, 탈출과 생존이라는 미션을 어떻게 이룰지에만 몰두합니다.
우리는 머나먼 타국에서 만나게 된 이 남북한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영화만 보고는 알지 못합니다.
한신성을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은 성과와 승진을 꿈꾸는 (단지 근무지가 매우 특수할 뿐인) 여느 직장인과 다르지 않아 보이고,
강대진 역시 안기부에서 왔다는 설명은 있으나 몸을 잘 쓰고 경계심이 센 모습만 언행을 통해 비쳐질 뿐입니다.
이들이 실은 보기보다 선량하고 정의롭다느니 하는 인격적 판단은 거의 배제된 채 현재의 행실만을 따라갈 따름이죠.
이는 림용수와 태준기를 비롯한 북한 대사관 사람들을 그리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영화 속 한신성의 말마따나 '설교 대신 대화'를 통해, 인물을 대변하지 않고 보여줄 뿐입니다.
<모가디슈>의 주인공들은 영화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내세울 만한 특출난 능력이 딱히 없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미션은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세상을 구해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 자체일 것입니다.
총알을 마치 폭죽처럼 무차별적으로 토해내고, 어린 아이들의 고사리손에마저도 총을 쥐어주는 시한폭탄 같은 환경 자체가
폭력인 내전 상황에서, 다른 그 어떤 폭력적인 이미지는 더 이상 전시도 연출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건조하게 전할 뿐인데도 위험천만한 기운이 사방에서 느껴지는 곳에서 살아남는 주체가 '나'에서 '우리'로 발전하는 과정은
구태여 과장하고 가공하는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숨막히는 도피와 추격, 경계와 공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전개됩니다.
감독의 명성에 걸맞게 끊이지 않는 액션을 기대한다면 숨죽인 도피와 은신이 주를 이루는 초중반이 다소 메마르게 다가올 수 있겠지만,
카타르시스를 위해 과장하려는 야심을 리얼리티를 위해 억누르는 것이 이번 영화의 의도였던 듯 하고 그 의도는 적절히 표현되었습니다.
'초인'이 아닌 '범인'들이 벌일 수 있는 최선의 액션이 아마도 카체이싱 장면일텐데, 후반 30분의 카체이싱은
장르적 측면에서 초중반부의 건조함을 일거에 날리기 충분할 만큼 강력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한국영화라는 프리미엄을 놓고 봐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수준으로, 저런 구도가 가능하단 말인가라는 감탄사를 연발케 합니다.
영화 속 탈출 작전은 이제는 사람 지치게 하는 클리셰에 가까워진 계략이나 배신이 아닌 오직 협동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남과 북을 넘나들며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의심과 경계의 단계를 거치면서도 결국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에 걸맞게 영화에는 쟁쟁한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소수의 히어로보다 다수의 주인공을 강조하기 때문에,
누구 하나 모나게 두드러지는 사람 없이 마음이 절로 안정되는 앙상블을 보여줍니다.
한신성 대사 역의 김윤석 배우는 외교관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정제된 프로페셔널의 이미지보다는
원숙하면서도 인간적인 직장인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영화에 사실감을 불어넣는데 일조합니다.
김윤석 배우가 영화의 드라마적 분위기를 형성한다면, 강대진 참사관 역의 조인성 배우는 단련된 신체적 능력과
경계심을 바탕으로 영화의 장르적 분위기를 형성하며 김윤석 배우와 좋은 균형감을 이룹니다.
나이로 인해 몸이 좋지 않는 가운데서도 강인한 판단력과 리더십을 보여주는 림용수 대사관 역의 허준호 배우,
강대진 참사관과 대립각을 세울 만큼 예민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결국 작전에 힘을 합치는 태준기 참사관 역의 구교환 배우,
위태로운 남과 북의 공존 속에서 침착하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한신성 대사의 아내 김명희 역이 김소진 배우,
공수철 서기관 역의 정만식 배우, 조수진 사무원 역의 김재화 배우, 박지은 사무원 역의 박경혜 배우까지.
사실 모두가 한 개성 하는 터라 언제 어떤 모습으로 유별난 활약을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배우들인데
이들이 그런 개성들을 내려놓고 평범한 직장인, 조직의 구성원,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포털 사이트 소개란에는 독특하게도 모든 극중 인물들의 역할명에 대사관 내 직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직원의 가족일 경우 직함 없음)
대개는 이름만 들어가 있던 자리에 직함이 붙으니 어딘지 리얼리티가 강화되는 느낌인데, 아마 영화의 의도이기도 할 것입니다.
보여주고 싶은 대로, 들려주고 싶은 대로 인물들을 가공하고 제단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면서 사건과 행적에 집중하겠다는 뜻일 겁니다.
이렇듯 <모가디슈>는 설교 대신 대화를, 장광설 대신 장면을 보여주며 이야기의 목적으로 관객을 자연스럽게 이끕니다.
굳이 감정을 잡을 시간을 따로 들이지 않아도, 음모나 간계가 아닌 오직 협동으로만 이루어진 탈출의 과정만으로
피와 땀을 함꼐 흘린 이들의 교감이 짧지만 얼마나 강렬했을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후, 끝끝내 신파의 유혹을 거부하고 얼굴에 나타나는 무엇이든 숨겨야만 하는 이들의 표정으로부터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끌어올리고 마는 영화의 엔딩에 이르면 영화의 이런 전술이 매우 유효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모가디슈>는 실화를 오락영화, 그것도 텐트폴 영화로 다룰 때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어떤 모범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 스크린X 포맷 관람을 권장합니다. 좌우로의 화면 확장은 물론 감각과 감정을 확장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합니다.
일촉즉발 시가전의 순간, 숨막히는 도피의 순간, 영화의 화룜점정이랄 수 있는 후반부 탈출의 순간 등
주요 장면에서 현장감을 극대화하는 역할도 기대만큼 수행해 내지만, 시야 확장 연출 외에도 장면 분할이나 콜라주 효과 등으로
인물들이 순간순간 느낄 갖가지 감정을 시각적으로 연출해 내는 것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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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정말 너무 공감가는 부분입니다.
ㄴㄴ다 공감가지만 특히나...^^#
ㄴㄴㄴ항상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언제나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PS : 직함 언급은 흥미롭습니다
후기 쓰면서 포털로 영화 페이지 한번 훑는데 직함이 굳이 적혀 있는데 눈에 띄더라고요 ㅎㅎ
역시 믿고 읽는 jimmani 님의 후기!!
제 생각도 잘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해요!!
한국은 1980년대에도 주요국을 상대로 유엔 가입의 당위성을 설득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다가 노태우 대통령 집권 이후 전개한 북방외교, 공산권 국가들의 올림픽게임 참가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했다.
특히 한국의 유엔 가입 노력이 급물살을 탄 것은 1990년.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이듬해 9월30일에는 소련과 수교했고, 10월20일에는 중국과 무역대표부 상호 교환에 합의했다. 그 해 가을 제45차 유엔 총회에서는 71개국이 한국의 유엔 가입에 적극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북한의 단일 의석 가입안에는 아무도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https://m.khan.co.kr/politics/north-korea/article/202102130852001/amp
un 가입 외교전 분량이 의외로 상당하던데 감독도 감독이고 텐트폴 영화라서 그랬겠지만 90년 말이라면 이미 결착이 나 있던 상황이라서 대통령궁 씬에선 실소가 나오기까지 하더군요ㅋ
북한은 한소 수교 5일째 되는 이날 「달러로 팔고 사는 외교관계」라는 제하의 로동신문 논평원의 글을 통해 『소련은 조선을 38선으로 분열시킨 책임이 있는 나라』라고 전제,『남조선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은 조선에 두개조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조선의 통일에 역행하는 분열주의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기로 했다는 소식과 때를 같이 해 남조선이 소련에 경제협력 자금으로 23억달러를 주기로 했다는 것이 발표되었다. 소련은 사회주의대국으로서의 존엄과 체면,동맹국의 이익과 신의를 23억달러에 팔아먹은 것이다.
[출처: 중앙일보] “체면ㆍ위신버리고 동맹국을 배신”/로동신문 한소수교 비난논설 요지
추가로 검색하다 이런 내용이 있는 댓글을 봤는데
당시 공산권 맹주인 소련 상대로 북한이 이렇게 분노발작 수준으로 길길이 날뛰던 시기라 한국 정부에선 철저하게 북한의 도발에 침묵 무대응으로 나가던 시기고 강 대사의 일화를 굉장히 빠르게 보도하면서 오히려 북한 측도 함께 치켜세우기까지 했던지라 영화 속의 전향서 위조라든가 결말부 국정원 직원들이 도발적인 모습은 괴리감이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