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잘리카투' 초간단 리뷰
1. 코로나19가 영화제를 초토화시키기 전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의미있는 영화들을 많이 건졌다. 거의 인생영화 반열에 오를 정도로 재밌게 봤던 '두 교황'부터 이주영 주연의 '야구소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기대 이상으로 잘만든 '도이치 이야기' 등. 어느 정도 기대하고 갔던 영화들에 비하면 인도영화 '잘리카투'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영화였다. 그저 카달로그에 삽입된 스틸컷이 매력적이라서, 프로그래머가 써놓은 시놉시스가 재밌어서 보기로 결정한 영화였다. '잘리카투'는 그 해에 봤던 모든 영화들 중 가장 제정신이 아닌 영화였다. 인도영화 특유의 '정신나감'과는 결이 다른 '야생의 정신나감'이 강조된, 이상한 영화였다. 분명 재밌게 본 영화고 '취향저격'한 영화였지만 "수입업자가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이걸 수입할리가 없잖아"라고 생각했다. 1년 넘는 시간이 지나고, 나는 한국의 수입업자 중에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2. 거의 2년만에 다시 본 '잘리카투'는 생각보다 정석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인도의 어느 시골마을이다. '평화롭다'라기 보다는 다소 정신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영화는 이들에 대해 '원래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인 것처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다 소가 도살장을 탈출하는 일이 발생한다. 영화는 별일이 아닌 것처럼 이 상황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 모닥불을 밟았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비명 너머로 '잘리카투'라는 자막이 무시무시하게 등장한다. 이는 재난영화 공식의 전형이다. 인물들을 소개하고 재난으로 초토화될 마을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재난은 아주 작은 곳에서 사소하게 시작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관객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 이 재난이 불러올 엄청난 파국을.
3. 마을 청년들 모두가 탈출한 소를 잡기 위해 분주하다. 이들 사이에는 리더도 없고 서로 자기 주장하기 바쁘다. 경찰이 관여하긴 하지만 경찰서장도 아내와 싸우기 바쁘다. 도망간 소를 잡는 일에 컨트롤타워가 없는 걸 보니 이 재난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어렵다. 전반부까지 주요 인물을 특정하지 않던 영화는 쿠타찬(사부몬 압두사마드)이 등장하고 나서야 인물을 특정하기 시작한다. 사고를 치고 마을에서 쫓겨난 쿠타찬과 그를 배신한 안토니(안토니 바르게시)의 갈등이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루고 주변사람들의 이야기가 곁가지처럼 펼쳐진다. 만약 '잘리카투'가 할리우드 재난영화였다면 쿠타찬과 안토니에 가장 비싼 배우를 캐스팅했을 것이다.
4. 서서히 재난(소의 공격)이 커지고 사람들이 당황한다. 재난을 수습할 기회가 있었지만 갈등하던 인물들의 탐욕으로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대규모 재난씬이 펼쳐진다. 자연재해가 등장하는 재난영화였다면 가장 많은 돈이 투입될 장면이다. '잘리카투'가 할리우드 재난영화와 달라지는 지점은 클라이막스 이후다. 할리우드 재난영화였다면 투닥거리던 쿠타찬과 안토니는 거대한 위협 앞에서 협업할 것이다. 그리고 재난을 수습하고나서야 두 사람은 화해할 것이다. 그러나 '잘리카투'는 그 정도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소가 탈출했다는 '재난'은 지진이나 폭풍처럼 중대하지 않다. 사람들끼리 파탄이 나더라도 탈출한 물소는 언젠가 인간의 손에 죽게 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지금 소가 중요한 게 아니다. 좀비 아포칼립스같은 장관이 펼쳐질 때 소는 진흙 속으로 파묻혀버렸다. '잘리카투'에서 소보다 많이 등장한 장면은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바라는 것이 있고 욕심이 있어서 싸우는 사람들이 이 영화의 핵심인 것이다. 때문에 쿠타찬과 안토니는 버디무비를 찍을 필요도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일 이유도 없었다.
5. '잘리카투'의 이야기가 전하려는 바는 구덩이 주변에 있던 노인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술을 들이키던 노인은 구덩이 주변에 모인 청년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저들을 봐라. 두발로 걷는 짐승과 다를 게 뭐가 있나"(정확한 워딩은 아님). 인간됨이 결여되고 욕망에 충실한 군상들은 동굴에서 나와 나무막대기로 소를 잡던 원시인과 오버랩된다. "재난을 극복하는 인간은 동화 속 이야기에 불과하고 인간은 본능에 충실하다"는게 '잘리카투'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는 코로나19 시대의 인간들과 오버랩된다. 팬데믹 위협 속에서도 본능에 충실하며 방역수칙을 어긴채 유흥을 즐기는 일뿐 아니라 타인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는 엄중한 상황을 정치·경제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재난을 극복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판타지와 재난 앞에 본능을 드러내는 탐욕스런 인간이 혼재하는 일상 속에서 살고 있다.
6. '잘리카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염두해두고 만든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치명률 1% 내외에 강한 전염력으로 일상을 붕괴시킨 이 바이러스는 가만히 내비두면 자연으로 돌아갈 물소와 오버랩된다. 인간들을 피해 도망치다 들판 한 가운데 선 물소는 어떤 공격성도 드러내지 않는다. 멀리서 달려온 '정신나간 안토니'가 물소를 칼로 찌른다. 그저 내버려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연이 인간을 공격한다면 이는 인간의 잘못이다. 탐욕과 욕망을 내려둔채 가만히 있다면 알아서 길을 잃고 가만히 있을 바이러스는 활동적이고 분주한 인간 덕분에 델타 변이까지 일어나 인간을 공격한다. 소는 진흙 속으로 사라졌지만 미쳐버린 인간들은 죽음의 탑을 쌓는다. 바이러스가 공기 속으로 사라지게 되면 인류는 어떤 죽음의 탑을 쌓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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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을 꿰뚫어 본 좋은 작품들은 예언적인 역할도 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