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문도 (1977)
이치가와 곤 - 이시카와 코지 콤비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영화다.
소설이 워낙 출중해서 이치가와 곤 감독이 거장이기는 하지만, 출중한 원작에 뭔가 플러스 알파를 한 것이 있나 모르겠다. 이치가와 곤 감독은 출중한 원작의 분위기와 주제를 충실히 재현하는 데 주안점을 둔 듯하다. 방대하고 섬세하고 복잡한 원작의 갈래 갈래를 풀어헤쳐서 영화 하나 안에다가 재현해 놓았다는 것은 놀랍다.
거장 이치가와 곤 감독이 아니라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옥문도라는 섬은 폐쇄적이고 고립되어 있어서, 섬주민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폐쇄적인 계급과 사고방식에 갇혀 살아간다. 그 섬에 군림하는 기토 가문과 기토 가문에 붙어 살아가는 섬 사람들, 주지스님, 의사 등. 이들은 과거 봉건시대에서 더 오랜 기간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봉건시대와 계급사회의 폐쇄성이 이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이치가와 곤 감독은 이런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사회 속에 자리한 비인간적인 심연을 파헤친다.
파푸아 뉴기니섬에 징집되어갔던 킨다이치 코스케는 구사일생으로 일본에 살아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전우 기토 치마타는 귀국하는 배 안에서 죽는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내가 죽으면 내 세 명의 누이동생들은 살해당할 거야. 내가 죽거든 꼭 내 고향 옥문도에 가 주게." 수수께끼같은 유언이다.
킨다이치 코스케는 옥문도라는 외딴 섬으로 찾아간다. 그는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와 너무나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의 욕망과 뒤틀린 계급구조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기토 치마타의 유언대로, 그의 세 명의 누이동생들은 차례로 살해 당한다. 그리고 킨다이치 코스케는 살해를 막으려 동분서주하는 한편,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두뇌싸움을 한다.
영화는 실로 잘 짜여져 있는데,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옥문도라는 섬 사회의 정체성이 깨지는 데서 온다.
옥문도라는 섬은 봉건사회의 정체성과 비합리성이 고여 썩은 물처럼 굳어져 있었다. 이 봉건사회가 깨지는 것은 서서히 온 것이 아니라, 2차대전의 참상과 비극 때문에 갑자기 깨진 것이었다. 옥문도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봉건사회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사건을 해결하는 킨다이치 코스케는, 미국 유학과 전쟁을 경험한 세대다. 킨다이츠 코스케는 봉건사회에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태도를 가지고 옥문도를 휘저어놓는다. 옥문도는 서서히 정신적으로 변화해나간다.
킨다이치 코스케가 살인사건을 해결하면서, 옥문도에 남아있던 봉건적인 사고와 계급을 뒤흔들고 파괴해버린다.
킨다이치 코스케는 범인을 지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봉건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통렬한 비판을 가하여 그를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만든다.
그는 자기 사고방식의 모순을 인정하도록 강요당하고 결국 무너져 반미치광이가 된다. 새로운 세대에 의한 봉건사회의 파괴는 이토록 철저하고 처절해야 한다고 감독은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와 감독 이치가와 곤은 2차대전을 일으킨 것이 종건사회의 기생충들, 바로 당신들이라고 비난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영화 옥문도 안에 흘러넘치는 비상한 에너지와 불안정성을 여기 기인한 듯하다.
또 하나 옥문도에서 매력적인 것은 바로 하이쿠의 활용이다. 꽃무늬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채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살해당한 소녀나,
무거운 범종 안에 갇혀 죽은 소녀 등 왜 굳이 이렇게 요란하고 기괴하게 살해했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드는 범죄다. 간결 화려한 일본식 미학을 살인에 적용한 것이다.
일본 전통 미학 하이쿠 세대와 논리 합리적 산문세대인 킨다이치 코스케의 대결이 펼쳐진다. 킨다이치 코스케의 천재성은, 하이쿠 세대가 아닌 그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짐작도 안 갈 기괴한 살인을 목격하면서, 그 안에 숨어있는 살인의 논리가 평범한 산문의 논리가 아님을 인식한 것이다. 그 시점에서 이 살인사건의 범인은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옥문도의 또 하나 특징은 일본의 전통 - 본가와 분가의 구분 및 그들 간 갈등, 폐쇄적인 사회가 사람들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풍속학적인 연구에 가까울 정도로 세밀하고 자연스럽게 묘사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재미를 이루는 것은, 킨다이치 코스케와 범인 간의 치열한 두뇌싸움이다. 이 영화는 명탐정이 두뇌싸움을 벌여 퍼즐을 푸는 고전적인 정통파 추리물이다.
그것도 일본 추리소설사 첫손가락에 흔히 꼽히는 걸작 추리물이다. 매우 서스펜스 넘치고 잘 짜여져 있다.
심증이 가는 사람은 너무 많으나, 그들 모두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킨다이치 코스케는 완전범죄를 깨부셔야 한다.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원작의 위대함이 가장 분명히 느껴졌고, 그 위대함을 인상적으로 스크린에 풀어헤쳐놓은 거장 감독 이치가와 곤의 승리이다.
추천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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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해주신 이색적인 영화들 중 처음으로 제가 본 영화가 나왔네요.^^
개인적으론 이 영화는 좀 아쉬웠습니다.ㅎㅎ
원작을 엄청 감명 깊게 봐서, 긴다이치 시리즈 DVD 박스 세트를 일본 아마존에서 사서 봤는데... 원작 만큼의 감흥은 못받았어요.
시리즈 첫 작품인 <이누가미 일족>이 완성도가 가장 높았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