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서울극장] 내 인생을 바꿔놓은 23년전 그 날의 기억을 꺼내 봅니다.
가장 최근 서울극장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익무님들 많이 아시겠지만 한때 서울을 대표했던 최고의 극장이자,
영화의 중심이었던 종로 극장가를 최후까지 지켜왔던 이 서울극장이 이제 약 한달 후면 문을 닫습니다.
누군가에겐 별다른 추억이 없는 그냥 근처 노인들 많이 오는 오래된 극장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겐 수 많은 추억이 담겨있는 정말 제 20대 시절이 고스란이 녹아있는 소중한 장소입니다.
한때 평일 낮에 가도 북적이던 곳이었는데 토요일 오후인데도
극장 앞도 로비도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하더군요[5월이었습니다]
이 극장엔 너무 많은 추억이 있어서 하나만 얘기하긴 어렵지만
제 인생과 청춘을 바꿔놨던 서울극장에서의 에피소드를 꺼내볼까 합니다.
사실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고등학교 시절 에피소드부터 써야 하는데
커뮤니티 특성상 그러면 아무도 안 봐 주실테니
최대한 압축해서 간략하게 써 보겠습니다.
이야기는 편하게 쓰고 싶어서 문체가 바뀌는 점 감안해 주십시오.
1998년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부푼 기대와 달리 학창 시절에도 경험도, 생각도 해 보지 못했던 '왕따' 를 대학에서 당했다.
특히나 1학년 1학기는 지금도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시간일 뿐이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6월 18일 방학을 맞았다.
방학이 시작되고 열흘간 집에만 처박혀 있었다.
괴롭고, 답답하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아직도 방학은 2달이나 남아 있었다.
이렇게 집에만 처박혀 있을 순 없었다.
1998년 6월 30일 화요일
12일만에 집을 나와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마이마이 카세트로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한 면의 음악이 모두 끝났을 때 눈을 뜨고 무작정 내렸다. 종로 3가 역이었다. 뭘 할까?
아는 거라곤 대학 입학 전 한번 와 봤던 서울극장뿐이었다. 무작정 갔다.
지금과 달리 무슨 영화를 하고 있는지 몇시에 하는지는 알 수 없는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고질라' 를 보고 싶었다. 크기가 문제다를 내세운 광고 문구가 기억난다.
그때가 1시쯤이었는데 하필 고질라는 이미 상영중이었고
다음 회차까진 2시간 가까이를 기다려야 했다.
흠..딱히 끌리는 영화가 없는데..하던 차에 눈에 들어온 영화가 있었다.
바로 '타이타닉' 이었다.
그렇다 98년 2월 20일에 개봉했던 타이타닉이 4달하고 열흘이 더 지난
6월 30일에도 메인 개봉관에서 상영중이었던 것이다.
물론 난 타이타닉을 개봉하자마자 신촌에 있는 녹색극장에서 봤다.
하지만 거긴 스크린이 너무 작기도 했고 타이타닉은 또 봐도 좋을 영화고
무엇보다 3시간이나 하니 이거 하나만 봐도 저녁까지 시간 넉넉하게 때워줄 것이고..
그래서 타이타닉을 또 한번 극장에서 보기로 결심했다.
이게 내 인생 최초의 극장에서 'N차 관람' 경험을 한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각 영화별 창구 매표소가 따로 있었다.
각 창구별로 한명의 여직원이 앉아 그 영화 티켓만 발권해 주던 때였다.
나는 타이타닉 창구에 가서 말했다.
"1시 40분 타이타닉 1명이요"
"1명이요?"
"네 1명이요"
"이걸 혼자 보신다구요?"
"네 혼자 왔어요. 한장만 주세요"
지금에야 혼영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지만 90년대만 해도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본다는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젊은 남자나 여자가 혼자 극장에 오면 불쌍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던 시절이었다.
표를 받아 나오는데 그 여직원이 옆의 여자와 나눴던 말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언니, 방금 타이타닉 혼자 보러 온 남자 있었어 ㅋㅋㅋ"
"진짜? 이 시간에 그걸 혼자 보러 와? 불쌍하다"
혼자 보는거 들키지 말라고 맨 뒤 제일 사이드 구석 자리로 줬더라 ㅋㅋ
아무튼 그렇게 극장에 들어갔는데 이미 개봉한지 4달도 지난 영화
+ 평일 낮 이라는 조건들이 겹쳐 관객이 나 포함 딱 6명이었다.
나, 커플 하나, 나와 같은 나이로 보이는 여대생 3명.
커플은 중앙쪽에 앉아 있었고 친구로 보이는 여대생 셋은 나보다 2줄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그들의 말이 여전히 생각난다. 이런 기억은 왜 이리 오래 가는건지..
"야 저기 봐봐. 맨 뒤에 남자애 혼자 왔어"
"진짜? 에이 같이 온 사람 화장실 갔겠지~"
"아냐 진짜 혼자 왔어. 와 어쩜 좋아 불쌍해라"
"와 어떻게 이걸 혼자 보냐? 같이 봐줄 친구도 없나봐. 나 같으면 그냥 안보구 만다"
아무튼 이런 얘기를 영화가 시작되는 그 순간까지 계속했고 영화가 끝나고 나가면서도 나를
참 불쌍한 애 보듯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요즘 친구들이야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땐 그랬다.
영화는 다시 봐도 참 좋았는데 영화 보고 나니 갑자기 화도 나고 속상해졌다.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애인은 커녕 친구 하나 없는 불쌍한 놈 취급을 받아야 하는건지..
그날 서울극장에서 내가 당했던 그 수모는 놀랍게도 나비효과가 되어
그해 여름이 내 인생에 잊지 못할 추억이 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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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마다 케바케였을거 같은데 저는 혼자서 고속버스 터미널에 있는 반포 시네마를 종종 갔는데 거긴 그 시절에도 혼자서 영화 보는[사실상 잠 자는] 중년의 아저씨들이 많아서 그런 시선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당시 서울극장은 그야말로 서울 중심가의 대형 극장[98년 당시 7개관으로 기억합니다] 이라 주로 데이트 하러 오거나 하는 곳이어서 그런 것도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학생들 여름방학 시점에 영화도 타이타닉인데 혼자 보러 왔더니만 유독 그랬던 거 같긴 합니다 ㅎㅎ 지나고 나니 다 추억이죠
인근 명보극장서 주말에 친구들과 매진된 회차 노쇼표 (전화 예매 있던 시절) 줄서서 기다리는데 직윈 분이
"혼자 오신 분부터 나오세요~" 크게 외치시더라구요?
그래서 수줍게 나오시던 유일한 여성 1분 거기 모든 사람들이 수근거리던 기억나네요~
당시엔 영화 혼자 보면 이상하게 봤었죠…
1. 친구도 없는 외톨이
2. 누군가와 함께 뭘 할줄 모르는 사교성도 없는 인간
이 취급을 참 많이 했었죠. 시대가 지나면서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점차 중요시하는 서구적 사상이 점점 강해지면 지금에야 뭐든 나 홀로가 대세가 되었지만 참 오랫동안 대한민국은 나보단 '우리'를 훨씬 중요시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나 혼자 뭘 하려는 사람들을 안 좋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지요. 제가 대학교때 왕따 당한 것도 그것과 참 연관이 큰데 군대 갔다 오고 나니까 그제서야 왕따에서 풀린 동기들이 그러더군요. 넌 시대를 참 잘못 만난 케이스라고, 지금 같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때만 해도 참 그랬다고..
정말 재밌게 관람하고 처음으로 영화상영 후 기립박수를 경험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뭐 혼자 볼수도 있죠~~예전에 친구넘하고 피카디리( 이때 서울극장 스피드 매진ㅠㅠ)에서 세상밖으로 봤었는데 다들남녀쌍쌍 이였어요 ㅠㅠㅎㅎ
어휴.. 혼영족에게 비수를..T_T
너무 아름다운글입니다~!!
직장이 대한극장 근처라 영화도 가끔보고 시사회도 다녔었는데 역사속으로 사라지는군요....
스마트님에게 추억의 장소로 영원히 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