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녀] 간략후기
이번 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배우의 스크린 데뷔작 <화녀>를 보았습니다.
윤여정 배우의 한국 배우 최초 아카데미 수상을 기념한 기획전의 일환으로 상영된 이 영화는
특히 윤여정 배우가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첫 영화를 함꼐 한 감독으로 언급하며 더욱 주목을 받았는데요,
그 주목이 과연 합당하다 싶을 만큼 50년의 시간차를 가뿐히 뛰어넘는 파격과 대담성을 지녔습니다.
지난 2018년 CGV 아트하우스 '김기영 감독 특별전' 당시 이후에 나온 <충녀>를 이미 보았음에도 놀라운 느낌이 온전히 살아있는,
김기영 감독이 지닌 날카로운 시대적, 미적 감각과 윤여정 배우의 날것 그대로의 연기가 어우러진 역작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살던 명자(윤여정)는 자신을 범하려던 이웃 남자들을 해친 후 친구와 함께 도망치듯 상경합니다.
시골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31층 빌딩'(삼일빌딩)도 있다는 말에 명자는 "떨어져 죽기 딱 편리하겠다"고 냉소합니다.
인력 소개소에서 친구는 유흥주점의 여급 자리를 따라 먼저 떠나고, 명자는 양계장을 운영하는 정숙(전계현)을 만납니다.
집안에서 식모로 일함은 물론 양계장 일도 거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명자는 그 집에 들어가겠노라고 자청합니다.
급여 대신에 좋은 곳에 시집 보내주는 조건으로 명자는 중산층 가정인 정숙의 집에서 일하고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는 아내에게 의지하며 작곡 일로 성공을 꿈꾸는 남편 동식(남궁원)과 두 아이들이 있습니다.
음악 일을 하다 보니 집에는 동식 곁에서 노래하고 곡을 받으려는 여자 가수 지망생들이 매일 찾아오는데,
셋째를 갖고 휴식을 취하러 친정으로 가는 길에 정숙은 명자에게 남편이 한눈 팔지 않도록 중간에서 잘 대처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명자는 천연덕스럽게 그 역할을 수행해 냈지만, 동식은 만취한 상태에서 명자를 자신의 음악 제자로 착각해 겁탈하고 맙니다.
동식의 아이를 갖게 된 명자는 이제 더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 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동식에게 매달리지만,
동식은 명자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정숙은 명자의 아이를 강제로 유산시킵니다.
명자는 더 이상 이전의 순진한 시골 소녀가 아니게 되었고, 자신으로 하여금 '애를 배게 하고 애를 떼게 한' 가정을 무너뜨리려 합니다.
지금은 누구라도 알고 있고 심지어는 시대의 흐름을 살짝 벗어난 것도 같은 '팜므 파탈' 스릴러의 전형을 띠고 있지만,
<화녀>는 정돈된 중산층 가정집의 내부를 보여주는 듯 하다 핏자국과 시체들로 이어지는 첫 장면부터 보는 이를 흠찟 놀라게 합니다.
앞서 나왔던 <하녀>와 이어서 나올 <충녀> 사이에 있는 <화녀>는 앞뒤의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생활력 있는 아내와 우유부단한 남편, 그 사이에 들어오는 또 다른 여자'의 구도를 유지합니다.
그러면서도 새로 지어진 '31층 빌딩'(실제로 영화가 나오기 1년 전인 1970년에 완공)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산업화로의 시대 전환'이라는 사회적 배경을 적극적으로 녹여냅니다.
새로운 사회상이 자리잡고 있을 서울에 대한 환상을 품고 시골에서 온 명자는 진화한 사회만큼 의식이 성숙한 세계를 꿈꿨겠으나,
그렇게 당도한 서울에서 만나는 건 자본이라는 또 다른 기준으로 세팅된 신분제도와 그 속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짓밟히는 존엄입니다.
명자를 둘러싼 사건의 참고인으로 명자의 친구를 부르면서도 면전에서 '난 시골에서 온 여자들은 안 믿는 주의'라고 쏘아붙이는 형사,
자신이 부정을 저질러 아이를 갖게 됐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도 빌기는커녕 그런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니 혼나야겠다고 아내를 야단치는 동식 등
영화는 지금 와서 들으면 한참을 시대착오적인 대사들을 그러한 사고방식을 지닌 캐릭터들을 통해 천연덕스럽게 뱉어내면서도,
그런 사고방식과 철저하게 대비되는 명자를 정면으로 충돌시킴으로써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 속으로 관객을 이끕니다.
명자는 한 가정을 파탄내는 '팜므 파탈'의 전형적인 예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하나같이 '맞는 말'만 골라서 합니다.
좋은 집으로 시집 보내주겠다고 약속해서 들어왔더니 자신의 이성을 가뿐히 놓아버린 채 명자의 앞날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았고,
그런 명자의 절망적인 상황보다도 추악한 진실이 탄로나고 그동안 축적한 것을 빼앗길 것을 더 두려워해 명자의 존엄을 흩뜨려 놓습니다.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상상해 왔을 어떤 젠틀함과 품위, 교양 같은 것은 애저녁에 땅에 내팽개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오물투성이 교양과 품격, 명예와 체면을 지키려 다른 이의 존엄을 짓밟는 이들의 모습은 명자에게 오히려 더 미개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높아지는 빌딩처럼 견고해지는 자본주의 속에서도 여전히 야만적인 욕망과 그 욕망을 감추려는 비열한 위선,
욕망하는 대로 움직이고 원하는 대로 말하기에 차라리 더 순수한 명자를 발작케 하는 그 세상을 향해, 영화는 명자라는 '칼'을 들어 반격합니다.
불세출의 거장인 김기영 감독은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내놓기보다 '하녀'를 원형삼아 시대의 흐름을 녹여낸 변주를 즐겨했고,
<화녀> 또한 그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이후 <충녀>, <화녀 '82>로 거듭 재해석했고 별세 전 또 다른 재해석 버전인 <악녀>가 예정돼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전혀 자기복제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그만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갖는 것은 다시 만들어지던 시대의 공기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김기영 감독의 감각, 그리고 패턴 따위 예측할 수 없는 윤여정 배우의 연기 덕일 것입니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무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는 극을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휘젓고 다니고 때로는 섬뜩하게 찌르고 다니며
극 전체를 돌진하는 그 에너지는 시대를 초월하는 명배우의 탄생을 예고했고, 그 결실을 50년 후 지금의 우리가 목격하고 있습니다.
추천인 17
댓글 13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결이 느껴지는 리뷰 잘봤습니다!
Ott서비스 웨이브 tv로 잠깐 보니 영자막이 같이 영상에 붙어있고 화질도 별로더라구요!
극장에서 볼려고 하는데요.
영상 화질이 얼마나 복원되고 작업되서 스크린으로 봣을때 어땠는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자막이 붙어있는 어처구니 없는 그런건 없는건지도요!
극장에서 보고 싶은데 주변에 상영관이 없어서 아쉽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