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 낙원의 밤] 간략후기
넷플릭스에 단독 공개된 박훈정 감독의 신작 영화 <낙원의 밤>을 보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박훈정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는 느와르의 질감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면서,
동시에 느와르라는 장르에서 미처 기대치 못한 감수성을 있는대로 끌어내면서 '스토리의 영화'가 아닌 '분위기의 영화'를 지향합니다.
익숙한 반복인 듯 하면서 동시에 꽤 낯선 실험처럼도 느껴지는 이 영화가 일관된 호응을 얻을지는 장담 못하겠습니다만,
그 이질적인 조합을 뚫고 나오는 뭐라 단정할 수 없는 감수성에 젖어들게 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느와르 장르를 보며 영화가 가야 할 길과 우리가 느꼈을 정서 사이에서 과감히 후자를 택한 경우랄까요.
조직의 2인자인 태구(엄태구)는 어느날 비극적인 사건을 접한 후 그에 대한 보복으로 상대 조직의 보스를 칩니다.
조직 입장에서 중대한 일을 태구 혼자서 해준 셈이기 때문에 보스인 양 사장(박호산)은 태구에게 마음 추스를 겸 제주도에 가 있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제주도로 간 태구는 그 바닥의 오랜 선배인 쿠토(이기영)의 집에 머물게 되고 그곳에서 쿠토의 조카인 재연(전여빈)을 만납니다.
매사에 냉소적이고 총을 매우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재연은 당장 죽는대도 일말의 두려움이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재연의 모습에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며 태구는 제주도에서 고요한 나날들을 보내지만,
끝났다고 생각했던 일이 더 심각한 상황에 몰리면서 서울에서는 태구를 파국으로 이끌려는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상대 조직의 2인자이자 실세인 마 이사(차승원)의 주도로 태구의 목을 조여오는 손길이 제주도로 향합니다.
낙원도 밤이 찾아오면 풍경이 자취를 감추고 짐승들이 득실거리는 법, 평화로운 낮을 끝낸 낙원에 핏빛 밤이 찾아옵니다.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 등의 각본을 쓰고 <신세계> 등을 연출하면서 어느덧 느와르 영화의 귀재로 이름을 알린 박훈정 감독은
이 신작 영화에서 '이야기의 영화'보다 '분위기의 영화'를 지향하며 일종의 실험을 시도합니다.
'큰 건을 치른 후 피신해 있던 갱스터가 조직의 배신과 마주하고 소중한 사람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지극히 미니멀할 뿐만 아니라 다른 느와르물에서 비장미를 극대화시키는 감수성을 자아내는 장치로 매우 익숙합니다.
참신하고 입체적이고 탄탄한 스토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공산이 큽니다.
대신 극대화되는 것은 이질적인 감성이 충돌하거나 공존하면서 빚어내는 긴장감입니다.
영화는 크게 태구와 재연을 중심으로 한 제주도에서의 그림 같은 시간들과, 마 이사와 양 사장을 중심으로 한 서울에서의 계략으로 나뉩니다.
일상물이나 다름없는 제주도 에피소드와 피칠갑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서울 에피소드가 분리되어 전개되지만,
언젠가 그 경계가 허물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계속 풍기고 결국은 예감대로 제주도에까지 어둠이 끼어들게 됩니다.
어둡고 폭력적인 기운을 내내 드리우기보다 한컷 차이로 그 곁에 아름다운 일상의 순간을 배치함으로써 긴장에 개성을 부여하는 것이죠.
독특한 분위기는 두 주인공인 태구와 재연 사이의 관계성에서도 느껴집니다. 멜로물보다 버디물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태구는 조직 세계에서는 함부로 길들일 수 없는 늑대처럼 야생성을 짙게 풍기지만 일상에서는 모든 것이 서툴고 조심스러운 양처럼 보입니다.
반면 재연은 내일 죽으나 내일모레 죽으나 매한가지라고 믿기 때문에 웬만한 것에 겁을 먹지 않아 제주도에서 적잖이 태구를 리드합니다.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은 일방향적인 보호-피보호 관계, 이성적으로 서로에게 빠져들게 되는 관계보다
서로 기대면서 불확실한 순간순간을 버티어 나가는 동료 같은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요한 해변과 우렁찬 파도, 장대한 숲을 오가며 박제하고픈 빛깔들을 발산하는 제주도는 그 독특함을 더 부각하는 듯 하고요.
이처럼 느와르물에서 능히 짐작되는 클리셰를 덤덤하게 차용하는 동시에 기묘하게 비틀기도 하는 영화의 노선이 꽤 매력 있습니다.
비극과 카타르시스 사이에서 예기치 못한 힘을 발휘하는 마지막 10분은 그 비틀기의 절정일 것입니다.
<낙원의 밤>의 만듦새가 건실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나, 배우 활용법에 대해서는 대체로 칭찬으로 의견이 모아질 것입니다.
(배우들 본연의 이미지를 활용한 것 뿐이라는 평가도 있겠지만, 그렇게 주어진 걸 제대로 소화조차 못시키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에서는 영화의 완성도에 따라 배우들이 빛을 발하거나 빛이 바래곤 했는데,
의견이 엇갈릴 수 있는 영화의 완성도와 별개로 배우들의 매력은 대단히 돋보인다는 점 또한 <낙원의 밤>의 특이한 점이겠습니다.
태구 역의 엄태구 배우는 (역할이 꼭 엄태구 배우를 위해 쓰여진 게 아닐텐데도) 그의 영화 속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를 극대화합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처럼 폭력의 정글을 누비다가도 어쩌면 그에겐 매우 생소할 일상 속에서는 쭈뼛거림을 감출 수 없는 모습은,
범죄의 세계에서는 이미 선을 넘은지 오래이나 인생의 세계에서는 아직 미성숙하기에 성장이 필연적인 인물에 대한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한편 재연 역의 전여빈 배우는 무엇이든 그려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얼굴로부터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그려냅니다.
생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는 것만 같은 싸늘한 감정부터 타인과 정서적으로 끈끈한 유대를 이루었을 때 맺히는 뜨거운 감정,
그 양가 감정이 합쳐지면서 뿜어져 나오는 힘까지, 엄태구 배우와 힘의 균형을 이루며 극을 신선한 기류로 이끌어 갑니다.
마 이사 역의 차승원 배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자기만의 원칙과 신념, 최소한의 윤리를 드러내며
점차 유머와 인간미를 지닌 인물로 입체화되는 연기를 보여주며 어두운 장르물에서도 여전한 내공을 보여줍니다.
의외로 영화에서 가장 분노를 유발하는 양 사장 역의 박호산 배우도 경멸스러운 소인배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내며 존재감을 새겼습니다.
<낙원의 밤>은 박훈정 감독의 최고작으로 치기는 힘들 듯 하고, 그렇다고 대중적으로 확실한 재미를 갖췄다고 보기도 힘들 영화입니다.
대범한 마무리에 이르기 전까지는 흥미를 끌기 힘든 이야기, 힘이 많이 들어간 대사 같은 것도 약점이고요.
그러나 엄태구, 전여빈 배우와 제주도의 얼굴을 최적으로 활용하여 사건과 폭력이 난무하는 느와르 세계 대신
감정의 일렁임과 소용돌이가 있는 느와르 세계를 구축했고, 멜로나 휴먼드라마 같은 타 장르와의 결합이 아닌
느와르 장르만의 견고한 전형성 안에서 특별한 감수성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얻을 것은 분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추천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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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잘 봤습니다. 이야기는 호불호 갈릴 거라 생각되는데.. 강렬한 캐릭터들이 있어서 오래 기억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