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 기억의 퍼즐을 맞추다 혼돈에 빠진 자아
치매 관련한 영화나 소설, 드라마는 지금까지 꽤 꾸준히 나왔습니다.
특히 요 몇 년간은 더 이상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이기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치매 관련 예방 센터나 치료 센터도 많이 생기고 있으며, 정보의 공유도 많습니다.
하지만 책과 많은 매체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직접 와닿는 문제가 아니라면 제3자의 입장에서 감상하게 된다. 나 또한 그래왔고, 많은 영화와 드라마, 책들을 읽었지만 아직은 먼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유난히 예전 같지 않음이 느껴지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심란해 하던 중 친구의 회사에서 단기 알바를 하면서 듣게 된 치매 검사 관련 음성 파일은 그야말로 큰 충격으로 와닿았습니다.
치매의 증상에 따라서 다르게 들리기도 하고, 나이와 성별에 따라서도 달랐는데, 치매검사 자체가 어르신들에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 였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들어도 스트레스로 다가올 검사였는데, 긴 시간 검사를 하려니 힘들어하시고, 나중에는 미안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데 대한 자괴감이 드시는 듯한 슬픈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저절로 눈물이 나왔습니다.
첫날은 몹시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게 된 <더 파더>는 치매를 더 이상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없다는 걸 명확하게 일깨워준 영화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이자 감독인 플로리안 젤러가 영화로 제작한 <더 파더>는 원래 2012년 프랑스에서 초연된 자신의 연극이 원작입니다.
치매에 대해서 그야말로 확 와닿는 이 작품은 그 후 영국을 비롯한 45개국에서 상연되었을 정도입니다. 프랑스에서 2015년에 <플로리다>라는 코미디 드라마 영화로 이미 만들어졌으나, 원작자인 플로리안 젤러가 직접 참여한 <더 파더>와는 결이 다른 느낌입니다.
플로리안 젤러의 연극 Le Père, 연극을 바탕으로 이미 만들어진 필립 르 게이 감독의 플로리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도대체... 나는 누구요?
더 파더
나이 든 아버지 앤소니와 아버지를 돌보는 딸인 앤
오페라의 아리아를 들으면서 시작되는 혼자만의 일상을 보내고 있는 황혼의 안소니.
그리고 그를 돌보기 위해 황급히 방문하는 가까이 사는 딸 앤.
아리아의 선율은 아름답지만, 너무나도 슬픈 울부짖음처럼, 현의 선율처럼 날카롭고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커튼을 치고 집안에서만 칩거하는 아버지에게 딸은 언제까지 이렇게 사실 거냐며 커튼을 열고 대화를 시작한다. 어렵게 돌볼 사람을 보냈는데, 커다란 다툼이 있었고 다시 돌려보낸 것입니다. 혼자서도 괜찮다면서, 돌봄이 필요하지 않다면서 강경하게 이야기하는 안소니는 새로운 고용인이 시계를 훔쳤다면서 해고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앤은 잃어버리신 게 아니고, 정말 훔친 거냐고 물어보고 어느 장소에 잘 두시니 찾아보시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딸이 야속하지만, 아버지는 그 장소를 찾아보고 시계는 정확히 그 장소에 있습니다.
농담으로 얼버무리려던 어색함을 뒤로하고, 다시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런던을 떠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앤.
여기까지 봤을 땐, 그 흔한 초기 치매 증상의 아버지와 딸의 대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며,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다는 딸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놀란 아버지.
섭섭한 마음에 날 버리고, 떠난다는 의미라면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거냐며 물어보지만,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다고 말합니다.
아리아를 들으면서, 마음을 다시 진정시키고, 문이 닫기는 소리에 딸인 앤을 불러보지만 기척조차 없습니다.
계속해서 딸을 부르면서 방 바깥으로 나오자, 웬 낯선 남자가 괜찮으시냐며 물어봅니다.
자신을 폴이라며, 소개하는 남자는 앤의 남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딸과 헤어지지 않았냐고 물어보자, 앤을 알아온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고 이야기하는 폴.
프랑스에 간다고 이야기하는 건 뭐냐며 물어보지만 폴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면서 장 보러 잠시 나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장을 보고 온 딸과 마주치는데, 목소리부터 얼굴까지 아까 대화하던 앤이 아닌 낯선 여자의 모습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당혹스러운 안소니는 낯선 남자인 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딸은 이혼한지 5년이 다 되어간다고 합니다.
영화는 치매 환자의 시점에서의 상황을 날 것 그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기억의 오류지만, 점차 시공간의 오류, 나아가서는 주변 사람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상황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억을 한다 해도, 그 기억은 마치 퍼즐처럼 조각조각 나서,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추론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내 기억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이 오기 시작하고, 오류처럼 보이던 상황들이 갑작스럽게 급변하는 시공간과 사람들.
익숙했던 그 모든 것들이 갑작스럽게 모두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같은 공간인 거 같은데, 묘하게 달라지면서 급변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선사한다.
연극이 원작인 작품이기에 영화로 연출하면서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으리라 생각하지만, 굉장히 영리하게 연출해냅니다.
비슷한 공간이지만, 가구와 그림들이 묘하게 달라지면서 어느 순간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변해버리는 연출은 심리 스릴러 영화처럼 긴장감을 가져옵니다. 공간뿐만 아니라 처음엔 혼자 등장했던 딸 앤, 그 사이 등장하는 사위 폴, 새로운 간병인들의 등장으로 극의 긴장감을 더해줍니다.
무엇보다 영화는 딸 앤의 상황에 대해서도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기에, 한층 더 가슴이 아파집니다.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면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고 돌봐주면서, 바라보는 표정은 정말 언젠가 누구라도 겪게 될 슬픈 상황을 미리 재현하는 기분입니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기억하지 못한 채 때론 분노하고 절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함께 무너져내리는 기분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보는 올리비아 콜맨의 연기는 정말 대단합니다.
아버지를 돌보는 문제로 남편과 심한 갈등을 겪었던 앤
새로운 간병인이 오자, 둘째 딸 루시를 닮았다면서 반가워하면서 이런저런 농담을 하는 척을 하다가 딸이 날 집에서 내쫓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서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부분이나.
과거에 둘째 딸 루시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다가 다시 떠올리지만, 이미 기억의 조각 속에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과정을 찬찬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낯선 변화 놀라는 부분이나, 정정하게 있다가도 시간과 날짜의 흐름을 분간하지 못하는 상황 등도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것은 부모님의 상황을 봐야 하는 자식의 상황과 함께, 언젠가 나의 상황이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이기에 맘 편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딸 루시와 닮은 새로운 간병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안소니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깨달기 시작했을 때,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익숙한 환경과 얼굴 속에서 어느 순간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내가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을 때 보았던 마지막 엔딩 부분의 대사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받았던 심리적 충격이 너무 컸습니다.
나는 과연 그 상황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 부모님과 나 자신의 기억이 무너지는 순간들을 견딜 수 있을 것인지, 기억을 잃으면서 일상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관객에게 많은 질문과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알던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너무나도 실감 나게 연기하신 대배우 안소니 홉킨스
* 추천영화 리스트 (더 파더의 여운과 충격이 충분히 가라앉은 뒤에 보길 추천)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마조리는 인공지능 월터에게 자신이 기억하는 순간을 이야기하며 잊고 지냈던 지난 시절의 추억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스틸앨리스 - 행복한 삶을 살던 앨리스는 희귀성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온전한 자신으로 남기 위해 당당히 삶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아무르 - 행복하고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음악가 출신의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 아내 안느가 갑자기 마비 증세를 일으키면서 그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달라지고,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그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내일의 기억 - 광고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에키. 지나간 시간만큼 기억을 잃어가는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소중한 추억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정보 출처 : 다음영화)
쥬쥬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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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닥쳐올 현실로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충격적이었어요.
영화는 어떠셨는지, 저는 충격의 여파가 쉽게 가시지 않는 작품이어서 영화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나왔어요.
끝에 적어주신 영화 리스트들도 훌륭하네요.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