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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더> - '나는 누구지'란 절박한 자문 (스포 후기)

알폰소쿠아론 알폰소쿠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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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jpg

지난 2월에, 골든글로브 기획전을 통해 먼저 보고 어제 저녁에 다시 한번 봤어요.  

 

정말 신선하고 훌륭한 영화입니다. 치매를 소재로 한 영상물은 꽤 있지만, 대부분이 가족 혹은 보호자의 시선에서 치매 환자가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형편에 놓여있는지를 보여주지, 이 영화처럼 대부분의 장면이 치매 환자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경우는 본 기억이 없네요. 굉장히 소름 끼치면서도 대담한 접근이었어요.  

 

많은 장면들의 시공간이 뒤죽박죽이며 앞뒤도 안 맞기 때문에 그냥 심각한 치매 환자의 극단적으로 혼란스러운 내면을 시각적으로 영상화했다고 보는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초반에는 명확하고 직선적인 줄거리가 없어서 혼란스러워지기도 하지만, 대충 감이 잡히는 중반부터는 정말 장면의 구성과 진행 자체에 흠뻑 몰입하게 됩니다.  

 

한편 각 장면마다 기묘하게 변주되거나 반복되는 상황과 대사들 같은 요소들로 관객들의 궁금증을 끊임없이 자극할 만한 텍스트들을 많이 던져주는 영화라는 점에서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jpg

 

이 영화를 두번째 봤을 때 새롭게 보인 것은 안소니 홉킨스의 동작들이었습니다. 좋은 배우는 얼굴과 입으로만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연기를 한다는 말이 이만큼 와닿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건 비닐에 있던 물건을 꺼내 아무렇게나 놓은 직후, 손에 쥐고 있는 비닐을 '어쩌다 이게 내 손에'라고 생각하듯 의아하게 여기며 어쩔줄 모르고 휘적휘적대는 동작들.  마땅히 손목에 채워져 있어야 할 시계가 없어 허전한 듯 손목 주변을 훑는 동작들.

 

이처럼 '어쩔줄 모르는' 동작들이 영화에 빼곡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 세세한 묘사를 넣었을 각본도 훌륭하지만, 정말로 당사자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그의 연기가 정말 탁월하더군요.

 

4.png.jpg

익무에서 글을 쓸 때든 어디서든 저의 개인사를 꺼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니 그냥 꺼내게 되네요. 저만 겪는 일도 아니고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요.  

 

재작년 돌아가신 친할머니께서 치매를 앓으셨습니다. 어른들이 흔히 말하시는 '귀여운' 수준의 가벼운 증상은 약 2년? 정도 달고 계셨던 것 같고, 돌아가시기 직전 몇달 간은 꽤 심했습니다.  

 

병원에 어쩌다 입원했는지 번번이 잊어버리셔서 자꾸 되물으시고, 난데없이 당신의 젊을 적 있었던 일을 어제 일처럼 얘기하시고, 당신의 형제들과 자식들이 나란히 있어도 헷갈려 하시고...   

 

한번은 제가 간병하고 있던 밤에 '내 엄마'를 오늘 만났는지를 살짝 물어보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수십년 전에 돌아가신 증조할머니를 제가 만났냐고 물어보신 거죠.  

 

가족들도 간병하다 보면 그런 낯설고 뚱딴지 같은 소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할머니 본인께서는 자신을 둘러싼 '낯섦'에 결코 익숙해지지 못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오래지 않은 그런 기억들 때문에 이 영화는 정말 무섭고, 소름 끼치고, 미어지도록 가슴 아팠습니다.  

 

 

1.jpg

 

이 영화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침식의 과정은 정말 최악의 질병이라 이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입니다. 

 

영화는 주인공 '앤서니'가 지나쳐왔을 수많은 시간대의 각기 다른 기억들을 조각조각 이어붙여 혼란스럽게 재구성했고, 이로써 '앤서니'가 한 순간 받아들이는 어마어마한 세월의 무게를 관객들에게도 체감하게끔 합니다.  

 

애지중지하던 시계, 딸이 그렸다는 벽의 그림들, 오랫동안 살았던 아늑한 아파트, 밝고 쾌활했던 작은 딸과 나를 보살펴 준 큰 딸, 나란 사람을 구성하는 관계와 기억들. 지금까지 '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많은 것들이, 세월에 걸쳐 모두 사라져갔다는 사실을 매일 깨닫고, 또 잊어버리고, 다음 날 다시 깨달을 겁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엄청난 무력감과 좌절 앞에서 외치는 '나는 누구지'라는 절박한 물음에, 관객들은 쉽게 대답할 수 없고 영화도 끝내 답을 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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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좋은 글 잘봤습니다! 저도 2번 봤는데 영화 초반에 앤이 파리로 가겠다는 말을 할 때 순식간에 연약해지는 안소니의 표정에 감탄했네요... 시계 타령하던 고집 센 노인이 한순간에 애처로워지는데 정말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ㅠㅠ 저도 치매 앓으셨던 조부모님 생각도 많이 나고 저 스스로도 나이듦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영화였어요!! 안소니 배우 상 하나 큰 거 받으시면 좋겠는데 ㅠㅠ 대진운이 안 좋아보이네요 ㅠㅠ
11:48
21.04.09.
profile image
MeYoo
저도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상을 수상하지 못하면 정말 아쉬울 것 같습니다ㅠㅠ
12:12
21.04.09.
profile image 2등

저도 비닐봉투와 손목슥슥 같은 동작들이 은근 눈에 들어오더군요.
99세 찍고 돌아가신 친할머니와 현재도 여전히 정정하신 95세 외할아버지를 모시고계신 부모님땜에 많이 와닿았습니다.
특히 저희 아버지(사위)도 스트레스 많이 받으셔서 감정이입이 좀 되더라는...
(내가 너희보다 오래살거야를... 진짜 들어보셨다고^^;;)

11:48
21.04.09.
profile image 3등
주인공의 기억이 뒤죽박죽 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왜 '테넷'을 떠올렸는지....ㅠㅠ
11:56
21.04.09.
네버랜드
저도 뭔가 테넷이 겹쳐 보이더라고요 ㅋㅋ
13:11
21.04.09.
치매 환자를 본 적이 있다면 정말 공감갈 만한 영화입니다. 내내 시계를 찾는 안소니를 보니 저도 할머니 생각이 나더라고요 영화에서도 이 고통을 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ㅋㅋ
13:13
21.04.09.
둘셋넷
관리자가 삭제한 댓글입니다.
15:35
2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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