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의 아내] 관람평(스포O)
며칠 전에 관람했지만, 평을 쓰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이 영화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포박당해 있었습니다. 아오이 유우의 속사포 같으면서도 송곳처럼 내리꽂는 대사소화력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습니다.
이미 개봉한 지 시간이 꽤 흘렀으니, 스포일러성 내용을 포함해 평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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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보러 가는 ‘척’했다. 그리고 부부는 나중에 함께 극장에서 요절한 천재감독 야마나카 사다오(중일전쟁에서 사망, 이 영화의 배경인 1940년에서 2년 전)의 영화를 본다. 아, 어쩔 수 없이 골수까지 시네필들이 합을 맞추었구나. <스파이의 아내>는 <아사코>의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의 각본으로 선배 구로사와 기요시가 연출한 시네마가 되었다.
‘차라리 이 영화 전체가 흑백이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도 해본다. 흑백은 컬러와는 다른 특유의 투명함이 있다. 상반적 흑백이 영사기로 재생된다. 시네마적 꿈과 낭만을 담은 영화도 흑백, 만주에서 가져온 그 끔찍한 기록물도 흑백. 이 영화에서 극중극은 제대로 위력을 발휘한다.
남편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가 기행(만주라고 하는 그의 말을 믿는다면)을 끝내고 고베 항으로 돌아올 때까지 영화는 평범하게 보였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었지만, 그저 전형적 스파이물 아닌가? 새로운 인물(히로코)이 등장하자 나의 안일한 생각은 박살 났다. 영화가 새롭게 시작하는 순간. 사건에서 심정으로 영화의 중심추가 이동하는 그 순간. 마치 <기생충>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린 후 전혀 다른 영화가 시작되는 것처럼.
어느 장르든 마찬가지지만, 특히 첩보물에서 극을 진행하는 동력원은 서스펜스다.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스파이의 아내>가 독특한 건, 이 영화의 진정한 서스펜스는 사건의 맥락이 아니라, 부부의 대화 사이의 행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첩보물의 액션으로 접근하고자 한다면 그저 시시할 뿐이다. 어떤 대단한 테크닉이나 트릭, 공작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 영화를 밀도 있게 만드는 건 부부의 간극이다. 사건의 서스펜스가 아니라 마음의 서스펜스인 것이다. 이 영화는 보는 쪽에서 예민한 감각으로 불안의 지형을 탐색해야 한다. 두 주연 모두 결정적 행동변화의 기점이 표면적으로 괄호 쳐져 있다.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헌병 분대장 타이지(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어렸을 때부터 흠모해 온 사토코에게 얼음을 건넨 때부터. 살얼음을 걷는 듯 불안의 지속. 그리고 남편과 조카가 만주에서 무언가를 목도하고 돌아왔다. 새로운 여인을 데리고. 군대식 경례마저 흉내 낼 만큼 군에 호의적이던 조카는 몇 주 만에 돌변해버렸다. 불안과 두려움은 사토코의 꿈을 타고 엄습해온다. 꿈의 엿봄으로써 우리는 사토코의 의식 저편에 숨은 이물질들을 알게 된다. 유사쿠는 위스키의 얼음을 노려본다.
처음부터 사토코에게 최대의 가치는 남편과 함께하는 ‘행복’이었다. 노트를 둘러싼 남편과의 설전에서 그녀 스스로 선언했고, 겉으로는 코스모폴리탄을 지향하는 남편이 만국의 정의를 설파해도 소용없다. 아내의 행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제 남편과 함께 찍었던 영화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현실을 영화에 싱크로나이즈한다. 남편이 어떤 드높은 이상과 논리로 스파이임을 부정하든, 제목처럼 ‘스파이의 아내’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행복’하게 망을 보고 도피하고 설렌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시대다. 제국의 국운은 황혼으로 접어든다.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입고 다니는 의복까지도 마음껏 고를 수 없는 군국주의가 팽배한 시대. 정상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 ‘판타지’가 되어버린 시대. 체스판을 넘어뜨린 사토코는 나름 다시 맞추어 놓았지만, 그걸 발견한 유사쿠는 말의 위치를 바꾼다. 작전의 체스판은 헝클어지고, 그녀의 장기 말 위치는 어긋난다.
유사쿠는 왜 필름 틴 케이스를 바꿔치기했는가? 아내가 차라리 헌병 타이지에게 (안전하게) 체포되는 시나리오를 꿈꾸었을까? 거짓말의 대답 대신 진실을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까?
유사쿠는 초반의 약속을 지킨다. 가혹하게 지킨다. 아내의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하고, 직접적으로 거짓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 맹세의 결과를 사토코는 칭찬한다. “훌륭해!” 마침내 사토코는 깨닫는다. 너무 유예된 깨달음이다. 유사쿠가 남긴 작별선물의 포장지가 풀렸다. 자신의 불안을 억누르고 현실을 지탱해온 판타지의 마무리. <스파이의 아내>는 메타적으로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은연중에 던진다. 이상을 노래하기도, 낭만을 쫓기도 하지만, 때론 팬보다도 강력한 증거, 현실의 거울이기도 하다.
암전되며 4년을 건너뛴다. 사토코는 광녀가 되어 병상에 있다. 잠깐, 여기까지 당신은 사토코의 그 모든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가? 심정적으로 측은해서 믿고 싶다면, 어느 범위까지 믿을 수 있는가? 스파이의 아내로 사는 위험한 행복을 얻고 싶었던 사토코. 의심에서 이상향으로(혹은 환상으로). 자신의 온몸을 던진 사토코. 혼란스러워진다. <스파이의 아내>는 아내 사토코 뒤에서 이야기를 쫓아갈 때와, 보이지 않는 남편의 행적만 따로 더듬어 갈 때,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가능성이 분화된다.
사토코는 남편과 계속 합치를 꿈꾸었다. 그러나 거리는 좁혀지지 못했다. 유사쿠가 행하는 쪽과 같은 편이라면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영속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 말로는 부정했지만 유사쿠는 스파이가 가져야 할 본분에 너무나 충실했다. 그에게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첩보놀이(그 고생조차도 당연히 받아들이는)를 하는 사토코에게 침묵의 이별을 고한다.
애초에 제국의 몰락은 그 촬영 필름에서 비롯하지 않았다. 사토코가 잡히고 얼마 뒤, 연합함대는 진주만을 기습했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 미국이 전면적으로 참전한 후에, 오만과 광기의 제국은 패망할 수순이다.
마음 한 편에 무언가 남는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사토코가 정신병원 침상에서 진단을 부정한다. 물론 그 시대가, 조국이 미쳐 돌아간 건 사실이기에, 그녀의 한탄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 그 말은 순수성을 담보하는가? 남편의 마음을 간파하지 못하고 동행했던 사토코의 이야기를 우리는 내내 보았다. 전쟁통에는 그 어떤 뉴스도 믿기가 힘들다. 이미 유사쿠가 말한 적 있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영화 마지막에 나온 실낱같은 그 희망의 자막. 당신은 믿을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믿고 싶은가?
1945년. 패망의 폭격 전주곡을 들으며 묵시록이 사토코의 눈앞에 실현된다. 한 개인이 침몰하는 제국에 휩쓸리고 그렇게 흐른 격동의 5년. 폭격의 불꽃에서 바다로. 아무것도 없이 비틀거리는 여인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사토코. 구토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황혼의 문턱에서, 불안과 의심의 운명’
★★★★
텐더로인
추천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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