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역사적 상상력 [자산어보]
메가박스 플러스엠의 이전 배급작 <나랏말싸미>는
지금 시점에서 개봉했다면 플러스엠 명의로 사과문이 나왔을 지도 모르는 역사 왜곡 영화였습니다.
(이 인터뷰에서는 광기마저 느껴집니다)
조선 전기의 절대적인 왕권을 현대의 시각에서 '교과서에서 본 상투적인 모습'이라 멋대로 단정하고
한낱 승려에게 세종이 "주상은 왕의 탈을 쓴 거지요!' 라는 모욕을 듣게 만들었던 영화입니다.
2019년에는 마가 끼였는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감독들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왜곡된
조선 전기 배경의 영화가 3개나 있었습니다.
<광대들: 풍문조작단>, <나랏말싸미>, <천문: 하늘에 묻는다>
물론 이 셋중에 나랏말싸미가 가장 있어서는 안되는 영화.
<광대들>은 너무 허무맹랑하고
<천문>은 한석규와 최민식 배우 - 세종과 장영실 - 두 사람 간의 브로맨스가 메인입니다.
하지만 나랏말싸미의 경우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일을 한글 창제설 중 하나로 끼워넣으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죠.
훈민정음 디자인이라는 역대급 오리지널 티켓만 남기고서 <나랏말싸미>는 처절하게 망했습니다.
플러스엠에서 역사 영화가 다시 나올 일은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요.
하지만 플러스엠에겐 <나랏말싸미>가 개봉중일때 촬영하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래부터는 <자산어보>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제목부터 올바른 상상력이라고 붙인 이유는 이 영화에서 정약전과 함께하는
창대가 직접 등장하는 건 아홉번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서문의 내용입니다.
“나는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 목적은 어보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섬 안에 장덕순, 창대라는 자가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손을 거절하면서까지 열심히 고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물고기와 물새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나는 드디어 이 자를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
(KBS에서 자산어보 개봉 기념으로 공개한 역사스페셜 자산어보 편입니다. 51:28부터 창대 관련 설명이 나옵니다)
창대가 섬사람인데도 열심히 고서를 탐독한다는 점에서
성리학을 세상을 바꿔줄 올바른 지식으로 맹신하는 젊은 꼰대로 설정하여
실학자인 정약전과 협력하면서도 대립할 때도 있는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정약전의 조용하고 정밀하다는 설명대로면, 창대는 입신양명의 꿈은 가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정약전, 정약용 형제가 편지로 주고받거나 시로서 표현했던
19세기 초 조선시대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셋 중에서 자산어보에서 다룬 건 군정과 환곡입니다.)
김의성 배우까지 캐스팅해서 창대의 가족을 만들고
당시의 비참한 백성들의 삶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화기애애하기 그지없던 섬 생활에서 갑작스럽게 갈등을 겪고 비참한 백성의 삶이 드러나는
이 부분은 박평식 평론가님도 '흠뻑 취했다, 섬에서만' 이라고 남기셨듯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연출입니다.
하지만 익무의 몇몇 분들도 남기셨듯이
정약전, 정약용을 이야기하면서 당시 시대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되는게 맞습니다.
유배지에서 어류도감을 만드는 이야기로만 끝나면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로 끝납니다.
이 두 사람은 실제로도 편지를 주고받고 제자들을 보내가면서
당시 시대 상황과 유학과 실학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유배생활동안 끊임없는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자산어보에 그림이 없는 이유부터가 정약용의 조언입니다.)
노전마을 젊은 아낙 그칠 줄 모르는 통곡소리 / 蘆田少婦哭聲長
현문을 향해 가며 하늘에 울부짖길 / 哭向縣門號穹蒼
쌈터에 간 지아비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 夫征不復尙可有
남자가 그 걸 자른 건 들어본 일이 없다네 / 自古未聞男絶陽
시아버지는 삼상 나고 애는 아직 물도 안 말랐는데 / 舅喪已縞兒未澡
조자손 삼대가 다 군보에 실리다니 / 三代名簽在軍保
가서 아무리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 薄言往愬虎守閽
이정은 으르렁대며 마굿간 소 몰아가고 / 里正咆哮牛去皁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는 피가 가득 / 磨刀入房血滿席
자식 낳아 군액 당한 것 한스러워 그랬다네 / 自恨生兒遭窘厄
무슨 죄가 있어서 잠실음형 당했던가 / 蠶室淫刑豈有辜
민땅 자식들 거세한 것 그도 역시 슬픈 일인데 / 閩囝去勢良亦慽
자식 낳고 또 낳음은 하늘이 정한 이치기에 / 生生之理天所予
하늘 닮아 아들 되고 땅 닮아 딸이 되지 / 乾道成男坤道女
불깐 말 불깐 돼지 그도 서럽다 할 것인데 / 騸馬豶豕猶云悲
대 이어갈 생민들이야 말을 더해 뭣하리요 / 況乃生民恩繼序
부호들은 일년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 豪家終歲奏管弦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는데 / 粒米寸帛無所捐
똑같은 백성 두고 왜 그리도 차별일까 / 均吾赤子何厚薄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을 외워보네 / 客窓重誦鳲鳩篇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260A_0040_010_1030
당시 군적에 오른 사람은 병역을 대신하여 군포(軍布)를 내게 되는데, 관리들이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이미 죽은 사람과 갓난아이의 이름을 군적에 올려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군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기막힌 현실을 두고 노래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부패한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에 기인하는 참담한 정경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애절양 [哀絶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을 넘는 녀석들 방송 이후 가장 고퀄리티로 영상화된
정약용의
<애절양(양근을 잘라버린 서러움)>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이게 이준익 감독님의 연출력이다 싶었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자산어보만큼 주요 내용으로 다뤄지는 부분이
교조화(불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처럼 맹신하게 되어 악영향을 미침)된 성리학입니다.
진리인 것처럼 세상에 퍼져 고통을 주고 있는 성리학을 대신하여
올바른 삶의 지식을 추구했던 유배된 지식인과,
성리학을 실천하여 세상을 바르게 만들고픈 이상이 있었던 한낱 어부를 통해
당시의 암담했던 시대상을 여과없이 묘사하고
그런 가운데 정약전, 정약용 형제가 추구했던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역사적 상상력이 올바르게 작용한 정말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작중에서 설정한 창대와의 관계 때문에
실제로는 한 번 인연을 맺은 뒤부터 가족처럼 모시고 장례까지 치러주었던
문순득의 비중도 줄고 이 부분은 각색이 심하게 되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이 영화가 문순득의 놀라운 여행기를 정약전이 책으로 써낸 『표해시말』을 영화화한 건 아니니까요ㅠㅠ;;
영화 보는 내내 어째서 서문 내용이 안나오는걸까 하다가
사람 참 가벼워보이던 문순득이 나라 잃은 것처럼 엉엉 울고 있을 줄 알았던 부분에
창대라는 자가 있었다 하는 서문 내용이 나오기 시작하니 참 기막힌 연출입니다.
각색이 되었지만, 그래도 창대라는 이름 두 자 강렬하게 남긴 영화였습니다.
어느 시대던 간에, 사실 올바르게 살기란 어렵습니다.
이상은 같았지만 올바르게 살기 위해 각기 다른 길을 택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LH 직원 부동산 투기 사태' 같은 부정이 일어나는 2021년,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보게 됩니다.
P.S 플러스엠은 이렇게 좋은 영화 배급해놓고 일본에 나랏말싸미가 상영되는 과오를 남기지 않길 바랍니다..
추천인 20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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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이준익감독님이 아예 싹바꿔서 새롭게 다시 찍어줬음 하는 개인적인 소망이...ㅜ
자산어보 흥행성적때문에 힘들지 싶습니다 ㅜ
영화 외적인 부분을 촘촘하게 살핀 맥락이 통철합니다
의미 있는 글, 일독했습니다 :)
사실 국사 / 한국사 시간에 삼정의 문란을 배우다보니 그렇습니다.
다른분들 후기를 읽어보니 흑백이라서 싫다. 코로나 상황인데도 어두침침하니 갑갑하다 하는 반응도 여럿 보이네요 ㅠㅠ
코로나 상황 아니었으면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잘 봤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사극은 확실히 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