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avigator (1924) 버스터 키튼의 걸작 모험영화
왜 버스터 키튼을 영화 역사상 최고의 대가들 중 한명으로 꼽는지 아는 데 참 오래 걸린 것 같다.
버스터 키튼이 1924년 만든 이 영화 내비게이터는 현대적 의미의 완벽한 블록버스터이다. 블록버스터의 원형이라는 것이 아니라, 블록버스터라는
이야기다. 징그럽게 잘 만든 영화다. 코메디, 로맨스, 호러영화, 모험액션영화 등을 완벽하게 결합하여 대작영화를 만들었다.
네비게이터라는 이름의 거대한 선박에 혼자 타게 된 버스터 키튼과 벳시라는 여인이 벌이는 모험과 러브스토리인데, 거대한 선박이 가지는
턴 빈 공간의 외로움과 공포, 그 안에서 서로 필요하게 된 키튼과 벳시 사이에 서서히 싹트는 사랑, 둘이 좌충우돌 벌이는 코메디, 배가 고장나 키튼이
잠수복을 입고 심해로 들어가 수리하는 에피소드, 식인종이 사는 섬에 표류하여 백여명은 되는 식인종과 키튼이 사투를 벌이는 액션장면이 아주 잘 결합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사투 장면의 커다란 스케일과 격렬함은 놀라울 정도다. 배 위로 올라오려는 식인종들과 배 위에서 이를 혼자 막는 키튼의
사투 장면은 심하게 말하면 우리나라 영화 안시성의 싸움 장면을 연상시켰다. 이쯤 되면 그저 코메디영화라기보다 완벽한 블록버스터 대작영화가
맞는 표현 같다.
버스터 키튼이 위대한 감독이라는 사실은, 영화 곳곳을 보면 느껴진다. 가령 영화 시작에서 키튼이 벳시라는 여인과 함께 텅 빈 네비게이터에 오르는 장면...... 네비게이터가 텅 빈 채 바다에 표류하게 된 이유는 어느 국가 스파이의 비밀작전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남자가 거대한 음모에 휘말린다는
플롯은 히치콕 감독 영화에 자주 나오는 주제이다. 키튼은 이 정도는 껌이라는 듯 아주 능란하게 거장의 터치로 이를 전개해나간다.
그런가 하면 거대한 선박에 혼자 있는 키튼의 공포와 고독을 아주 잘 그려내었는데, 텅 빈 거대한 공간이라는 공포스럽고 공허한 주제를 작은 영화 스크린 안에 너무도 잘 포착해내었다. 그리고 텅 빈 공간에 어둠이 찾아들 때 공포도 잘 느껴진다. 이 영화는 1920년대 영화다. 오늘날 영화가 가지는 여러가지 장치들이 없는 원시적인 영화임을 감안해볼 때, 그저 놀랍다.
키튼과 벳시 간 사랑이 싹트는 장면도 시간을 들여 아주 치밀하고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처음엔 반갑지만 경계도 되었다가, 생존을 위해 서로 협력하게 되고, 이것이 서서히 사랑으로 발전되어가는 과정을 아주 자연스럽고도 치밀하게 묘사한다.
내가 버스터 키튼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그의 디테일에 대한 치밀한 집착과 개연성에 대한 완벽한 추구이다. 가령 키튼이 잠수복을 입고 심해로 배를 고치러가는 장면에서 가장 먼저 공들여 잠수복의 질감이나 형태, 이것을 입었을 때 키튼이 느낄 고립감과 갑갑함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평범한 감독같았으면, 아니 평범하게 좋은 감독같았으면 과연 이랬을까? 이것은 곧이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키튼이 이 잠수복을 입고 심해에도 갔다가 바다에 빠져 죽을 뻔도 했다가 식인종들이 사는 섬에 쳐들어가기도 했다가 모험을 벌이기 때문이다. 이 잠수복의 질감이나 형태, 입었을 때 느낌에 대해 키튼이 생생하게 묘사해 놓은 때문에, 관객들은 위의 장면들에 아주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버스터 키튼과 식인종들 간 사투는 스케일이 엄청나다. 거대한 스케일 영화에 익숙해져있는 나조차도, 이 장면은 스펙타클하다 하고 감탄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위대한 감독으로서의 버스터 키튼의 트레이드마크는, "한 치의 공간도 빈 틈으로 남겨두지 않고 완벽하게 장악하여 활용하였다"인데,
그의 영화를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굉장히 치밀한 계산에 의해 공간의 활용만으로 긴장과 웃음, 이완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놀라운 장면은 더 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최후를 각오하고 서로 껴안고 바다로 뛰어든 키튼과 벳시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아래 잠수함이 있었던 것이다.
뜬금없는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놀라운 반전이 있다. 아까 식인종과 키튼이 사투를 벌일 때, 구석에서, 바다 위에 조그맣게 잠망경이 이리저리 헤치고 다니는 장면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다시 보고서야 알았다. 그러니까 그장면이 뜬금없이 느껴지는 것은 관객이 부주의해서 그런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주의 감독이 버스터 키튼이다.
버스터 키튼은 과거시대 뉴욕을 그린 our hospitality 라는 영화에서 아예 과거 뉴욕을 찍은 장면을 배경으로 합성해 사용하기도 했다. 이거 1920년대 영화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 영화는 슬랩스틱 코메디다. 심형래 식 슬랩스틱 코메디를 1시간 10분 채워서 위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가 머릿속에서 멜로디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고 하던데, 키튼의 머릿속에서는 슬렙스틱 코메디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던가. 그것도 피식하고 웃기는 장면들이 아니라,
배를 잡고 웃을 정도로 강력한 것들이다. 그리고 위 영화 이야기만 듣고 보면 아주 긴 영화일 것 같은데, 1시간 10분짜리 영화다.
길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의 밀도가 아주 높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이 보드빌 코메디를 영화로 만들었다면, 키튼은 영화적이다. 그의 동시대 코메디언들이
보드빌 코메디 혹은 소규모 원시적인 영화를 만들었다면, 키튼은 세련되고 복잡한 현대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여기서 현대는 오늘날을 지칭하는 말이다.
버스터 키튼 영화를 보면, 도발적인 난센스, 난폭한 유머, 무의식, 초현실주의 등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요소들은 이미 영화사에 전설이 되어 있으며,
여기저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드빌 코메디언 출신 버스터 키튼이 어떻게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지 신비롭기만 하다. 살바도르 달리나 프로이트를
만난 것도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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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채플린 영화도 찾아 보고 있는데... 키튼영화는 생각보다 찾기 힘든 것 같습니다. ~~
버스터 키튼의 걸작들로 꼭 보아야하는 작품은: 제너럴, 셜록 주니어, 네비게이터, 카메라맨, 우리의 환대 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