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 관람평 (약스포)
입소문이 자자한 이 영화를 저도 관람하고 왔습니다.
다른 분의 리뷰에서 영화 <테넷>이 언급되었는데, 저도 마찬가지로 생각이 나긴 하더군요.
노파심에 스포 표시를 하긴 했지만, 사실상 스포일러를 제대로 말한다는게 (<테넷>처럼) 거의 불가능한 영화입니다.
저에게 이 작품은 올해의 명작입니다. 아래는 관람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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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허탈한 표정으로 깨진 잔의 파편을 주워 담는다. 그 컵은 원상복귀 시킬 수 없다. 불가역적인 것이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딸(올리비아 콜먼)과 아버지(안소니 홉킨스)의 관계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시간은 투쟁의 대상이다.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문턱에서 시간과의 사투를 벌여야 할 것이다.
이 처절함을 담은 영화가 우리에게 도착했다. <더 파더>.
관객으로서 여러 번 당혹스런 순간이 온다. 당황스럽다. 플로리안 젤러 감독의 의도가 명확하다.
“당신도 방관하지 말고 어디 한 번 제대로 체험해봐라. 그리고 그 무력감을 느껴봐라”였다.
사실 이 영화의 세팅과 구성은 연극적이다. 의원과 요양원을 제외하고는 거의 집에서만 벌어지는 이야기. 핀조명도 있다.
하지만 이 당혹스러운 기분의 체험은 시네마적 방법론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더 파더>는 편집과 연출의 승리다.
단선적으로 진행했다면 지루할 법도 했지만, 이 영화는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긴장이 있다.
요양원의 안마당엔 커다란 얼굴 조각상이 있다. 깨어진 얼굴의 파편이다.
안소니는 매일 깨어진, 페이스 오프된 얼굴들을 본다. 얼굴들은 대상을 뒤바꿔 그와 관객을 연신 혼란스럽게 한다.
안소니는 말한다. “나에게 두 개의 시계가 있어. 하나는 손목에, 하나는 머리에.” 그는 손목시계를 자꾸만 잃어버린다.
사실상 그는 물리적 시간의 상징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인식하는 시간의 관념을 계속해서 잃어버리고 찾으려고 투쟁하는 중이다.
머릿속에서 그는 계속해서 시간을 달리고 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아니라 <시간을 달리는 할배>인 셈이다.
그가 듣던 CD의 재생이 먹힌다. 음이 삑삑 반복된다. 서글프게도 그의 하루도 소음의 나날이다.
쳇바퀴 도는 안소니의 삶에 관한 은유로 볼 수도 있겠다.
이 영화에 제시된 공간들은 각기 다른 장소임에도 상당히 유사하게(복도식으로)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다.
노인의 추억과 얽혀 이 공간들은 서로 셔플링되고 트랜스포밍된다.
그는 자신을 침몰하는 배의 선장에 비유했다. 그의 삶이 실시간으로 침몰하고 있다.
우리는 운명의 시간에 다가가는 주인공의, 거의 오기에 가까운 외침과 절망을 본다.
영화 안에서도, 실제로도 37년생인 안소니 홉킨스의 머뭇거리는 입과 갈팡질팡하는 혀는 우리를 서글프게 만든다.
이 영화가 관객을 단지 비애의 감정에만 내버려두지 않는 건 숙제가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령사회로 들어서는 각 나라의 숙제이자, 언젠가 닥칠 수도 있는 나의 문제가, 미래가 시간의 지평선 어딘가에서 손짓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가역적 시간에 저항하는 오기와 절망’
★★★★
텐더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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