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힘] 여기 머물러도 된다는 인정을 받기 위한 전쟁
실화 기반의, 결코 잘 산다 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소년이 자기 재능으로 미래를 잡아쥔다는 인상 때문이었던지 이 영화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생각났습니다.
중간 중간 오버랩 장면과 갑자기 보여준 흥이 넘치는 장면 같은 것들은 비슷한 감상을 주긴 했네요 ㅎㅎ
체류증이 빨리 나오려면 올림픽 메달리스트거나 해야한다는 말처럼, 자신의 가치를 망명하고자 하는 나라에 증명하면 그 울타리 안에 "빨리" 넣어줄 수 있습니다. 잔인하지만 합리적인 시선 속에서 프랑스어권 출신도 아닌 파힘이 가족들과 함께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그 성적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던 아버지(죄송해요 처음엔 가족 버릴 줄..)와 가족들의 앞날은 오로지 파힘의 체스 실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파힘에게 체스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닙니다. 공격하되, 때론 안전한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전략적 후퇴를 선택할 줄도 알아야 하는 전쟁입니다.
영화는 파힘과 아버지가 왜 고국과 가족을 떠나 프랑스로 와야 했는지, 파힘이 어떻게 프랑스 체스 챔피언이 되는지를 가볍게 따라갑니다. 방글라데시를 탈출하는 장면들은 스킵이 많아 조각들을 얼기설기 이어 붙였다는 느낌도 듭니다. 다른 분이 후기에 쓰신 것처럼 장점이자 단점이 이야기가 가볍고 전개가 빠르다는 겁니다. 대체로 유머러스하며 큰 위기도 없습니다.
파힘의 곁에는 그 동심을 지켜주는 것 마냥 좋은 어른과 좋은 또래 친구들이 생겨나 그를 지켜주고 응원합니다. 프랑스어권 세네갈에서 온 난민 친구는 보호소와 학교에서 늘 함께하며 파힘이 프랑스어에 익숙해지도록 돕고 클럽의 친구들은 자기 집에도 데려가며 일상을 함께하고 현지인들이 구사하는 단어 습관들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불어 인사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성인 남성인 아버지는 힘겹게 버틸 뿐입니다.
이민자나 난민 중 아이가 더 빨리 말이 늘어 부모의 통역을 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는 학교에 다녀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겠죠. 체류 1년이 넘어가도 불어 한 마디 제대로 못 하는 파힘의 아버지 누라의 모습은 답답함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다만 난민-불법체류자의 상황에서 필수적이지 않은 언어 교육은 당장 하루 돈 몇 푼을 버는 것보다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고, 언어조차 제대로 못 하는 이를 써줄 일자리는 없고 악순환에 빠질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영화는 가볍지만 뒷맛은 씁쓸합니다.
누군가는 그냥 태어났더니 주어진 것이 누군가에게는 끊임없이 자기 효용가치를 증명해야만 하는 전쟁일 뿐이라는 걸 다시 깨닫게 합니다. 저조차도 영화를 편히 볼 수 있는 입장에서, 파힘이 영화로 나올만한 이야기를 갖고 있어서 응원할 수 있는 거니까요.
최근 네덜란드 내각 총사퇴를 불러일으킨 육아지원금 부당 환수가 인종 프로파일링을 통해 이민자 가정들을 중심으로 행해졌으며, 그럼에도 해당정권에 대한 국민 신뢰가 여전하다는 걸 생각하면 유럽 전반적으로 파힘의 배경이 되는 2011~13년보다 심해졌으면 모를까 과연 더 나아졌을까 싶네요.
+
-체스 클럽의 원장(?) 마틸드! 썸머85의 알렉스 어머니 역의 이사벨 낭티여서 너무 반가웠어요.
-체스 클럽 부모면 다 보내고 싶어할 거 같아요. 영재 교육 중 하나인 체스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데 운동도 시키고 같이 놀게도 해주고 대회도 알아서 데려다줌. 지금 시국에도 태권도장을 닫을 수 없는게 이미 운동뿐 아니라 예절 교육, 체험학습, 놀이, 맞벌이 자녀 보호(추가 보육) 등 육아종합지원센터 역할을 하고 있어서라고 하던데 딱 그 역할이네요 ㅎ
-크레딧에 France info (총리 대담 라디오 방송국) 허가 어쩌구를 본 거 같은데 실 라디오 음성이 사용된걸까요
-영화는 방글라데시/프랑스 어로 진행되지만 자막은 독일어?였는데 확실히 양국은 문화콘텐츠 생산은 합작을 많이 한다는 느낌입니다. (프랑스나 독일 영화 크레딧에 자주 보이는 아르떼(arte) tv가 프-독이 공동 설립한 방송국)
+프랑스어가 익숙치 않은 파힘과 그 또래 어린이가 주기 때문에 비교적 쉬운 편이었던 거 같아요. 배우시는 분들이 청취 연습하기 좋을 영화 같아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