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 어느 한쪽의 입장으로 치우치지 않아서 신선하고 좋았던 영화 - 약스포
영화 못잖게 연극을 좋아하는지라 이번에 개봉한 영화 '안티고네' 는 내겐 익숙한 작품이었다.
연극으로만 안티고네는 3번쯤 접한 것 같으니까. 물론 영화 '안티고네' 는 그리스 신화를 다룬 작품이 아닌
현대의 캐나다의 이민 가족이 배경이지만 그 주인공 이름이 '안티고네' 라는 것은 이 영화에 어떤 내용이 담길 것인지를
예상할 수 있다. 먼저 우리가 이름은 어디서 들어본 듯한 '안티고네' 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두면 좋은데
<프레더릭 레이턴이 1882년 그린 신화 속 안티고네의 이미지>
안티고네는 우리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 속 '오이디푸스' 왕의 딸로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킨 딸이다. 그녀의 인생은 비극적으로 막을 내리는데
두 오빠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래스가 왕좌를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다 둘 모두 사망하고 만다.
이 둘이 죽고 정권을 잡은 이는 안티고네 형제들의 숙부 크레온. 그는 에테오클래스의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에 올랐기에
에테오클래스에겐 성대한 장례식을 치뤄주지만 폴리네이케스에겐 장례를 허락치 않고 들판에 버려 썩게 둘 것을 명한다.
그러나 안티고네에겐 폴리네이케스도 소중한 가족.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에 모래를 뿌려 장례의식을 행하였고
이에 격노한 크레온은 사형을 선고하고 무덤 안에 산채로 가두고 안티고네는 목을 매 자살한다.
<영화 안티고네의 포스터가 그리스 신화 안티고네와 비슷한 버전이 존재하는지 알 수 있다>
이상이 간단한 안티고네 스토리인데 이렇게까지 몰라도 된다. 간단하게 안티고네는 가족[특히 남성 형제들]을 위하다가
본인의 인생마저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여인이고 이 영화도 그런 내용일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캐나다 몬트리올. 여기 알제리 이민자 가족인 안티고네 패밀리가 있다.
부모님은 조국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할머니와 두 오빠, 미용실을 내는 것을 꿈꾸는 언니와 할머니 이렇게 다섯 식구다.
많은 것이 부족하고 힘겹지만 각자의 꿈을 꾸며 캐나다에 정착해 살길 바라던 이들에게 큰 비극이 닥친다.
큰 오빠 에테오클래스가 경찰의 총에 사망하고 그것에 항의하던 작은 오빠 폴리네이케스가 구속된 것.
작은 오빠는 이번 일로 인해 캐나다에서 모국으로 강제 추방될 예정이고 그렇게 되면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다는 생각에
안티고네는 머리를 깍고 문신을 해 가며 위장을 해서 면회를 간 틈에 바꿔치기를 시도해 대신 감옥에 들어가고
폴리네이케스가 미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 작은 오빠가 무사히 도망가고 나면 미성년자인 자신은
추방까지 되지는 않을 것으로 계산한 것. 금세 발각된 안티고네의 행동은 언론에 의해 대서특필되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안티고네는 SNS를 타고 저항의 상징이자 영웅이 되어 간다.
내가 이 영화가 정말 신선하고 좋았던 것은 요즘 나오는 여타의 영화들과 달리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하거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단정짓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자.
메르켈의 독일은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트럼프의 미국은 국경에 장벽을 쌓아 이민자들을 막았다.
힘없고 약한 사람들은 도우는 것이 옳으니까 독일이 옳고 미국이 잘못된 것이다. 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휴머니즘으로,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 있지만 현실은 결코 그럴수는 없다.
누군가의 선의로 한 행동이 누군가에겐 씻을 수 없는 비참한 결말로 다가올 수도 있다.
각자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이기에 섣불리 옳고 그름을 재단할 수 없는 것임에도 지금의 시대는 네편 내편,
옳고 그름을 너무 선명하게 그어놓고 그 잣대에 어긋나면 서슴없이 비난을 퍼붇는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최근 보기드문 중립을 지킨 영화였다. 내가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시시각각 마음이 변함을 느꼈다.
초반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인해 에테오클래스가 사망하고 폴리네이케스를 추방한다고 할 때 분노했다.
그런데 이들은 알고 보니 마약을 팔고 폭력을 저지르는 범죄조직의 일원[특히 형은 높은 위치]으로
캐나다 사회 입장에서 볼 때는 자신들에게 하등 도움이 안되는 내쫒아야 되는 존재가 맞았다.
안티고네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가족을 위한 행동이라지만 그녀의 행동은 범법행위이며,
사회적 입장에서 봤을 때는 감옥에서 벌 받아야 할 마약상이 탈옥해서 또 다른 범죄를 일으킬 지 모르는 골치아프고 불안한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다시 인권의 문제가 떠오른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난민과 이민자에게 너무나도 가혹했던 이 사회 때문이 아니었는지?
이대로 추방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베풀어야 하는 것인 아닌지?
그런데 마지막 부분 다시 한번 반전이 생겨난다. 안티고네가 자신을 희생해서 살리려 했던 폴리네에케스는
동생의 희생으로 얻은 기회마저도 너무나도 허망하게 날려버리는 구제불능의 인물이었을 뿐이다.
이런 이민자들을 구태여 끌어안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이렇듯 영화를 보는 내내
안티고네의 입장에 동조됐다가 캐나다 사회의 입장에 동조됐다가 내 마음조차 오락가락했다.
우리나라도 현재 제주도에 입국해 있는 난민들이나 조선족 관련 문제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고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 VS
자국민도 먹고 살기 힘든판에 왜 우리가 세금을 지원해 가며 위험을 감수하고 살아야 하냐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런 시대와 환경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바다 건너 외국의 이야기만이 아닐 수도 있다.
바로 내 이웃에서, 내가 사는 이 곳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이야기이니만큼 많은 이들이 막 내리기 전에 이 영화를 만나봤으면 좋겠다.
동네 극장에선 제대로 상영을 해 주지 않아 주말 오후 상암동을 찾아
홀로 보고 왔는데 원정을 다녀온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추천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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