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심의등급에 대한 잡담입니다
80년대초에 한국의 영화심의등급은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연소자(미성년자)관람가/국민학생관람불가/연소자관람불가.
지금으로 치자면 전체/12세/청불... 대충 여기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지금과는 좀 개념이 다르긴 하지만...
같은 시기 미국에도 세가지 등급이 있었습니다
G/PG/R
미국이나 한국이나 같이 세가지 등급이 있으니까
G=연소자관람가, PG=국민학생관람불가, R=연소자관람불가...
이렇게 치환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어느정도는 맞아떨어지긴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복잡하게 얽힙니다. 미국과 한국은 심의의 개념이 달랐으니까요.
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심의도 아니고, 공공연하게 검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국가에서 영화를 검열하고 국민이 볼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서 봐도 된다/안된다하고 명령하는 식입니다.
이와는 달리 미국에서의 영화 심의는 학부모들을 대상으로하는 권고사항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심의기관에서 영화를 먼저 보고는 미성년자에게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는 것입니다.
등급의 명칭도, 한국은 단순하게 된다(가) 안된다(불가)로 규정이 되어있었지만 미국은
G=모든 관객이 볼 수 있음
PG=성인 보호자의 시청지도가 필요함
R=미성년자의 단독 관람을 금함(보호자와 동반입장은 가능.)
이런 의미이고 가불가를 판단하는 주체는 보호자입니다.
보호자=성인이 영화를 볼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이러니, 서로간에 1대1로 맞아떨어질 수가 없는 거죠.
G 등급의 경우는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은 거의 미성년자관람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PG 등급인 경우에는 보호자의 시청지도를 권장할 뿐, 미성년자가 단독으로 영화를 보는 걸 막지는 않습니다. 한국에는 '시청지도'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한국식 가불가 개념으로는 G나 PG나 똑같이 전체관람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PG 등급 영화도 한국에서는 전체관람가를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레이더스] [이티]같은 스필버그 영화들.
PG 영화중에는 살짝 폭력적이거나 가벼운 노출이 나오는 영화들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국민학생관람불가를 받았습니다.
R 등급인 경우는 복잡합니다. 미국에서 R 등급을 받게되는 사유는 아주 많은데, 흔히 생각하는 폭력과 섹스야 두말할 것 없고, 범죄 마약등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등이 다 해당됩니다. 당시에는 f-word가 영화에 단 한번만 나와도 바로 R 등급을 때려버렸다고 합니다.
그와는 달리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청소년 보호라는 개념이 잡히지 않았고, 특히나 폭력적인 컨텐츠가 끼칠지도 모르는 영향에 대해서는 아예 무관심하던 시절이라, 당시에는 얼마나 야한가...의 여부로 미성년자 가불가를 결정하는게 일반적이었습니다. 노골적인 노출이나 노골적인 베드신이 있는 R등급 영화라면 미성년자관람불가 확정이지만, 없다면... 어지간하면 국민학생관람불가였습니다.
과도한 폭력묘사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매드맥스]는 거의 잘리지도 않고 국민학생관람불가였습니다.
여성의 가슴 노출 정도는 중학생이 보는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어떤면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관대했죠. 피와 나체가 난무하는 [13일의 금요일], [엑스칼리버]같은, 지금은 청불이 떨어질 영화들이 장면들이 잘리거나 단축되긴 했지만 그래도 폭력장면과 노출장면이 꽤 남아있는 채로 국민학생관람불가였습니다.
한국영화와 외국영화에 서로 다른 잣대가 적용되었습니다. 외국영화는 어느 정도 노출이 있어도 국민학생관람불가를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한국영화는 여성의 신체가 조금이라도 노출되면 거의 미성년자관람불가 확정입니다.
R 등급 영화가 여성 신체 노출이 없고 폭력묘사도 미약한 경우에는 전체관람가를 받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나 언어문제로 R등급을 받은 영화라면 우리나라에서야 전혀 해당사항이 없었죠. 못알아들으니까...
그당시 한국의 심의/검열에서 1순위로 생각하는 기준은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리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높으신 분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라면 통상적으로 심의에 걸릴만한 부분도 통과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반공.
람보 시리즈 1,2편은 미국에선 둘 다 R등급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색정 묘사가 전혀 없고 폭력성만 다소 높았던 1편은 국민학생관람불가였습니다.
1편을 훨씬 능가하는, 그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과도한 폭력묘사로 전세계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람보2]는 국내에서는 공산당 때려잡는 교육적인 영화라서... 별다른 삭제도 없이 전체관람가를 받았습니다.
전쟁의 잔혹한 실상을 묘사해 R 등급을 받았던 [킬링필드]는 역시나 반공교육영화...라고 전연령관람가를 때리고는 그것도 성이 안찼던지 전국의 학교와 기관에 단체관람동원령을 내려 강제로 흥행1위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반공영화라면 전체관람가 영화에서는 절대 금기시되는 여체노출까지도 허가가되곤 했습니다.
글구... 한국에는 검열삭제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수위가 높아 논란이 될만한 영화라면 아예 들어오질 못했고, 야한 장면이 있는 R등급 영화라고 해도 베드신을 싸그리 삭제하고 학생용으로 개봉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관과 신사].
그래서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아예 대놓고 에로를 표방하지 않았다면 미국영화는 미성년자관람불가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신에(?) 그시기에 한국영화는 대다수가 미성년자관람불가였죠.
뭐... 그러니까 미국의 R 등급은 한국에서는 전연령에서 미성년자관람불가까지 모두 소화가 되는 마법의 등급이었습니다.
한국식 가불가 개념으로는 G나 PG나 같다고 했으니까 미국에는 미성년자관람가/불가 이 둘 밖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미국내에서도 불만이 제기되어 1985년에 중간단계로 PG-13이 신설되었습니다.
거기 영향을 받은건지 어떤건지 몰라도 우리나라에는 1986년에 고교생관람가 등급이 신설되었습니다. 대충 현재의 15세에 해당하겠네요.
PG-13은 우리나라에선 거의 국민학생관람불가와 연소자관람가 사이에서 왔다갔다했습니다. 고고생관람가 등급이 신설되었으니 R 등급 영화가 국민학생관람불가를 받을 확률은 낮아졌죠.
이례적인 경우로, 존 카펜터의 [빅트러블]은 PG-13이고, 영화 내용상 여성의 노출이나 과도한 폭력이 없고, 저연령층이 좋아할 만화같은 내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미성년자관람불가를 받아서 전국의 극장주들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빡친 극장주들이 미성년자들을 암암리에 걍 들여보내줬다는 전설이...)
90년대가 되면 비디오 시장이 성장하게되면서 비디오물 심의가 중요해집니다. 근데, 극장 심의를 받았던 영화도 비디오로 내려면 심의를 또 받아야 되었어요. 극장과 비디오의 심의 기준이 달랐습니다. 극장 심의의 기준은, 심의위원 꼴리는대로.... 비디오 심의의 기준은, 심의위원 꼴리는대로....
그래서 극장영화가 비디오로 나오면 등급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국의 경우 가정용 비디오물 심의가 극장보다 느슨합니다. 극장은 공공장소이기 때문에 살짝 빡세게하고, 자기 집 안방에선 뭘 보건 개인의 자유이므로 가정용 심의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극장에서는 삭제상영하고 홈비디오로 무삭제판을 내는 경우도 꽤 많죠.
반대로 한국의 비디오 심의는 가정용이 극장용보다 훠어얼씬 빡셌습니다. 극장에서 (이미 심의를 받고) 멀쩡히 상영되었던 영화가 비디오로는 여기저기 삭제되어 되어서 나오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등급은 오히려 올라가는 경우도...
극장에서 전연령관람가였던 [레이더스]는 비디오로는 빨간띠(=미성년자관람불가)로 나왔습니다.
지금이야 옛날 영화의 극장상영 당시의 등급은 알기가 어렵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디오 영화 등급을 기억하고 있을테니(포털등에 표시된 등급도 비디오 등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즘 극장 심의가 너무 관대해졌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예전의 비디오물과 대비되는 기억 때문일 겁니다. 그보다 전의 극장 심의는(높으신분들의 안위에 지장이 되지만 않는다면) 어떤면에서는 지금보다도 더 느슨했습니다.
군사정부가 물러나면서 검열은 심의가 되었고 심의기준도 점점 완화되고 한국도 점점 미국식 심의에 가까워져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과거에는 없었던 '시청지도'라거나 '보호자 동반시 관람가능'같은 것들도 도입이 되었습니다. 심의도 예전에는 특정장면이 나오면 무조건 삭제, 또는 등급UP이었지만 지금은 전체적인 맥락을 봐가면서 유연하게 하고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대부분의 관객들이 '가불가' 형태의 심의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X세 미만인 경우 보호자 동반시 관람가'라는 건 보호자가 함께 영화를 보면서 시청지도를 하라는 것인데, 시청지도라는 게 대체 뭔지 어떻게하는 건지, 알지도 못하겠고, 예전부터 가불가에만 길들여져 있다보니 'X세 미만인 경우 보호자 동반시 관람가'를 단순히 'X세 미만도 관람가'로만 해석해서는 아이들에게 유익하지 않은 영화에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을 동반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이런건 캠페인을 통해서 조금씩 바꿔나가야할 일입니다. 시청지도를 어떤식으로 해야할지 부모가 지도를 받아야할 판인데 그런 것 없이 그냥 심의형태만 미국식을 흉내낸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관객의 입장에서도 전체적인 맥락을 보기 보다는 아직도 특정한 장면만 나오면 무조건 등급이 바뀌어야한다는 그런 인식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XX영화는 YY한 장면이 나오는데 왜 12세인거지?'라는 식의 불만제기가 흔히 보이죠.
근데 그게 관객의 인식문제라고만 볼 수도 없는 것이 아직까지도 심의는 심의위원이 꼴리는대로 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그런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으니까요.
sattva
추천인 12
댓글 1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