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 간략후기
2018년 <서치>라는 걸출한 스릴러를 내놓으며 주목받은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신작 <런>을 보았습니다.
<서치>가 오직 컴퓨터나 TV 등 오직 모니터 속 이미지만을 활용한 연출 기법으로
첨단 기술 속에 내재된 동시대성을 한껏 드러냈다면, <런>은 그와는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자연스레 나타날 법한 손쉬운 기술의 유혹을 애써 잘라낸 채,
작은 사건을 놓고도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게 하는 제약을 두며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히트한 전작의 방식을 이어가지 않고 정반대의 노선에서도 힘 있는 연출을 보여준 덕분에
믿고 볼 만한 스릴러 감독이 또 한 명 나왔음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엄마 다이앤(사라 폴슨)은 선천적으로 장애를 안고 태어난 딸 클로이(키에라 앨런)를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다이앤은 딸로 하여금 건강을 위한 철저한 루틴을 몸에 익히게 하며 체계적인 홈 스쿨링을 진행하면서도
언제나 딸을 사랑으로 보듬었고, 클로이는 평생을 집에서만 지내면서도 똑똑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런 클로이가 이제 어느덧 대학에 입학하고 성인이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중,
클로이가 엄마의 장바구니에서 한 약통을 발견하면서 행복했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아닌 엄마 앞으로 처방된 약통에 의아해 하던 클로이는,
그 약통 속에 담긴 약을 엄마가 자신에게 먹이려 하자 불편한 의심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동안 휠체어를 타고 집안에서만 살아온 것이 엄마의 '보호' 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클로이는 직감하게 되지만, 만일 그렇다면 이제는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알아내야만 합니다.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전작인 <서치>도 따지고 보면 '아빠가 실종된 딸을 찾는다'는,
스릴러 장르에서는 그리 새롭지는 않은 스토리를 다루었으나 도전적인 형식이 주는 임팩트는 상당했습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진실이 드러나고 괜한 의심을 자아내는 데 있어 그 형식이 하는 역할이 상당히 컸죠.
<런> 역시 '장애를 지닌 딸과 그를 과잉보호하는 엄마'라는 설정은 꽤 익숙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스스로 제약을 부여함으로써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익숙한 이야기를 따라가게끔 합니다.
우선 장애를 지녔으면서 동시에 엄마의 보호를 받음으로 인해 사건의 진실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딸을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물리적인 상황 연출에 갖은 변수를 부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딸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일방적인 피해자로 남지도 않습니다.
영민하고 추진력 있는 딸은 자기 앞에 닥친 상황을 재기 넘치게 돌파하며 역으로 뜻밖의 변수를 만들기도 합니다.
덕분에 이야기에 별다른 변주나 트릭을 쓰지 않아도,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싶을 때
허를 찌르는 캐릭터의 행보가 펼쳐짐으로써 섬찟한 여운을 남기기도 합니다.
감독이 전작 <서치>와 정반대로 디지털 기술의 이로운 점을 거의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도 돋보입니다.
전작의 경우 오직 디지털 환경에서만 극이 전개되다 보니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정보들을 주시하며
단서를 찾아내야 하는 재미가 있었다면, <런>에서는 그 반대로 디지털 환경으로 가는 경로를
최대한 차단하여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정보의 지름길 또한 거의 없애버립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예상되는 스토리로 흘러가는 가운데에도 정보의 공백이 생기며 긴장감을 유발하죠.
그런 와중에 딸에게 결국은 위협적인 존재인 엄마는 정작 딸에게 한번도 공격적인 언사를 하지 않아서
엄마와 딸 사이의 관계성에 의심을 하게 되는 순간이 때때로 다가오기도 하는 등,
감독은 제약이 주어진 환경이 유발하는 궁금증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는
전통적 스릴러 방식으로도 상당히 매끈한 연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가해자-피해자 관계가 아니라 쌍방적 충돌과 대결 구도를 유지하는 영화 속에서
엄마 다이앤 역의 사라 폴슨과 딸 클로이 역의 키에라 앨런이 보여주는 연기 대결이 돋보입니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래치드>에서도 소름끼치는 소시오패스를 연기한 바 있는
사라 폴슨은 <런>에서 비슷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다른 결의 연기로 또 한번 관객을 압도합니다.
극진한 모성애로 포장된 외면 속에 얼만큼의 무모함을 품고 있을지 가늠할 수 없는
다이앤의 모습을 찌를 듯 날카로운 연기로 그려내며 불가능할 것 같은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한편 클로이 역을 맡은 신예 배우 키에라 앨런은 이에 뒤지지 않는 강인한 캐릭터로 선방합니다.
실제로 장애를 갖고 있기도 한 키에라 앨런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겁에 질리려 할 때쯤
상황을 반전시키는 영민함을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로 표현하여 긴장감의 균형을 이루어냅니다.
여담으로 <서치>에서 존 조가 맡은 주인공의 아내로 출연했던 사라 손도 등장해 반가웠네요.
사실 <런>은 포스터만 봐도 대략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 가능하고,
실제로 영화는 그 짐작을 굳이 요란하게 벗어나려 하지 않고 충실히 따라가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한 시도 주의가 흩어지지 않는 몰입감을 자랑하는 것은 감독의 역량 덕이 큽니다.
전작만큼 창의적인 연출 방식을 거듭 주장하지 않아도, 지극히 전통적인 스릴러 작법을 따라가도
그에 뒤지지 않는 서스펜스를 선사하는 이 영화는 스릴러 장르에 있어서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역량은 우연이 아닌 믿을 만한 재능임을 입증합니다.
추천인 12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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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들었던 생각인데, 스토리의 '예측 가능성'이란 요소는 영화의 재미랑은 딱히 큰 연관성이 없다고 봐요 ㅋㅋㅋ
익숙한 이야기더라도 얼마나 능숙하고 세련되게 관객 앞에 펼쳐놓는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기를 정독하다가 아직도 [서치]와 인연이 안 닿았음을 깨닫고, 뒤늦게 그램 노트북으로 [서치]를 감상하고 왔습니다ㅠㅜㅠㅜ
[서치]가 감동적인 오프닝부터 폭발적인 전개와 압도적인 결말까지 1분 1초의 표현력이 완벽한 영화였어서,
극장에서 본 예고편이 제겐 많이 무서웠지만 [런]도 안 볼 수가 없게 되었어요;ㅁ;